▲김대중육성회고록 표지김대중육성회고록 표지입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대통령, 1998년 대신 1999년에 가서야 생산적 복지를 내세우다
김대중 대통령이 생산적 복지 정책을 통해 한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김대중 집권 이전 한국의 사회복지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5년 단임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안에 이와 같은 업적을 낸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5년 단임제 대통령의 힘이 가장 강할 때인 집권 첫 해인 1998년 대신 1999년에 가서야 이를 국정의 주요 아젠다로 내세웠다. 1960년대 대중경제론을 제창할 때부터 복지국가의 실현을 자신의 주된 정치적 목표로 내세웠던 김대중이 왜 이것을 집권 직후부터 강하게 제시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서 김대중은 이 책 568쪽과 569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질문 : 대통령님께서는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국정운영 기조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강조하셨습니다.
김대중 : 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노선을 통해서 경제시스템의 전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경제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고 정책대안도 꾸준히 제시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국정노선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머릿속에 구상해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구조개혁을 하려고 했고 나중에 여기에 더해서 생산적 복지를 추가했던 것입니다.
질문 :생산적 복지를 추가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김대중 :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가부도 위기에서 이것을 전면에 내놓게 되면 국내외적으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논쟁 등이 발생해서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지정책을 실시하는 데에도 부담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때 극우세력들이 나에 대한 사상공세를 오랜 기간 해왔는데, 이것이 해외에도 일부 영향을 주어서 내가 노동계에 치우친 입장을 갖고 있다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복지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내걸지 않고 감춰뒀다가 급한 불을 끄고 난 뒤인 1999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산적 복지를 이때 꺼낸 것은 나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에 가서야 생산적 복지를 국정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1월 1일 신년사에서 생산적 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생산적 복지를 국정의 새로운 목표이자 새천년을 준비하기 위한 과제로 제시했다.
생산적 복지를 1999년부터 추진한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이 아니라 1999년부터 복지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내세운 이유는 1998년에는 IMF구제금융사태로 인한 국가부도위기와 경제파탄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김대중이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한국경제는 침몰 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어서 국가부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김대중은 당선 직후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김대중이 이때 취했던 전략은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적 대타협과 대통합의 정치를 통해 국력을 모으는 일이었다.
김대중 집권 이전 한국은 대타협과 대통합의 국정운영 경험이 없었고, 정권을 잃은 보수 진영은 김대중 정부 초대 총리 지명자인 김종필 국무총리의 국회 인준을 반대할 정도로 국란 극복에 비협조적이었다.
김대중은 이러한 구조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치사회적인 대립과 갈등 발생이 불가피한 진보적인 의제의 공론화를 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래서 위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생산적 복지를 처음에는 강조하지 않았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반응까지도 고려한 것이었다.
국내 우파들은 수십년 동안 김대중에 대한 터무니없는 색깔론 공세를 했고 이들의 마타도어는 미국 사회에도 영향을 주어서 미국 내에서 김대중의 경제노선에 의구심을 갖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김대중 당선자가 미국과 IMF 등이 제시한 경제구조개혁 방안을 제대로 추진할지 여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1997년 12월 22일 립튼 미국 재무차관이 김대중 당선자 만난 이유
1997년 1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 3일 만에 립튼 미국 재무차관이 급히 한국을 방한해서 김대중 당선자를 만난 것도 이와 관련된 일이었다. 립튼 차관은 한국경제 구조개혁 방향에 대한 김대중 당선자의 입장을 직접 듣고 향후 미국 정부의 대응 방향을 결정하려고 했다. 김대중은 이때 상황을 이 책 561쪽과 562쪽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나를 테스트하려고 왔어요. 내가 정말로 시장경제원리에 의해서 철저하게 개혁할 의지가 있는지, 정리해고를 받아들여서 기업을 먼저 살리는 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온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한 나의 답이 만족스러우면 우리를 지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는 결정을 하려고 온 것이었어요. 그러니 이 사람은 우리에게 천사가 될 수도 저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김대중은 젊었을 때부터 관치경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강조했었다. 김대중은 계층·산업·지역간 균형발전을 주장한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며 개발독재노선을 반대했을 뿐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경제개혁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오랜 기간 반공색깔론에 의한 마타도어 공세를 심하게 받았기 때에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처럼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언론의 편향성이 심했기 때문에 김대중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미국이 이러한 테스트를 한 것도 이와 관련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