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8일 5.18공식행사에서 '임을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기로 한데 대해 항의의 뜻으로 유가족들이 민주의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조정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앞서서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당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아는가? 안다면 언제 누구에게 배웠는가? 내가 처음 이 노래를 들은 것은 8여년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거리 집회에서다. 그때 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집회의 시작을 알리는 '민중의례'의 일부였다. 현장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이 노래를 자연스레 따라 부르며 박자에 맞추어 팔뚝을 치켜들었다. 나는 곁눈질로 입을 벙긋거리며 궁금해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언제 누구에게 이 노래를 배웠을까?
몇 년 후 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에 입당하면서 나는 유튜브를 보며 이 노래를 외웠다. 당에서 하는 모든 행사의 시작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1996년생 정치인인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전 비대위원장이 5.18 기념식에서 가사를 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들은 언제 누구에게 이 노래를 배웠을까. 그들 주변의 모두는 세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전부 이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걸까? 이 노래는 내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아픈 기억과 역사를 전하는 연결의 상징이자 한 사회가 세대를 건너 역사와 문화를 전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깨워주는 단절의 표상이기도 하다.
시인 김남주의 이름도 그랬다. 몇 달 전 김남주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기고를 요청받았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김남주 시인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념사업회는 시인을 잘 몰라도 괜찮다고 했다. 이제부터 알면 되지 않느냐고, 모르면 모르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고를 계기로 '87둥이' 정치인인 내가 45년생 '해방둥이' 김남주 시인의 시와 삶을 진지하게 마주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분명 하나의 새로운 연결이다. 단절의 시대인 지금은 이런 연결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무지하고 성실한 독자로서 김남주의 시와 삶을 마주하고 그 감상을 부족하나마 글로 써보기로 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니 <김남주 시전집>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0년 전, 김남주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그가 작품활동을 한 약 20년 동안 남긴 총 518편의 시 전부를 총망라한 대작이다. 엮은이들은 그의 옥살이를 중심에 두고 그의 시를 크게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인한 투옥 이전의 시, 옥중시, 그리고 출옥 이후의 시라는 세 가지 범주로 분류했고 자잘한 오류를 수정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큰일을 해주신 엮은이 염무웅 임홍배 두 분께 감사드린다. 김남주의 삶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그를 아끼는 사람일수록 고되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문득 엮은이들이 이 책의 첫 시와 끝 시를 무엇으로 했는지가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김남주 시전집>은 '잿더미'에서 시작해 '역사에 부치는 노래'로 끝이 난다.
시로 그려낸 자유와 통일의 세계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 '잿더미' 중, 김남주
자신에게 다가올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미리 예감하기라도 한 것일까. '잿더미'에서 김남주는 피가 터져 나오는 선명한 폭력 앞에서 꽃 같은 영혼이 육신과 함께 어떻게 짓눌리고 불타 잿더미가 되어가는지 성찰하고, 처절한 고통을 예감하면서도 이를 견뎌내야 더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의지로 시를 맺는다.
서른을 바라보던 1974년에 처음 문단에 데뷔하며 발표한 이 시는 향후 김남주가 살아갈 삶의 프롤로그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김남주는 민중의 관점, 특히 농민의 관점에서 줄기차게 정권을 비판하고 자유와 통일의 세계를 시로 그려낸다. 그리고 5년 뒤, 시인은 투옥된다. 30대 중반, 꼭 나와 비슷한 나이의 시인이 감옥에 실려가는 마음을 노래한 '이 가을의 나는'을 읽으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책장을 덮어야 했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중략)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넛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 '이 가을에 나는', 김남주
이 시가 쓰여지던 1979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기치로 내걸며 부유층 응징과 무장투쟁을 외쳤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는 실패로 돌아갔고 여기 몸담았던 시인은 온갖 수모와 폭력을 겪으며 영어의 몸이 되었다. 1979년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며 대한민국 사회가 다시금 큰 혼란에 빠져들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1980년대에 김남주는 몸은 '푸른 옷의 수인'일지언정 영혼을 시에 담아 세상을 펄펄 날아다니며 당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투쟁의 불꽃을 지폈다.
그의 옥중시들은 현실에 대한 절망과 세태에 대한 일갈, 이상에 대한 희구, 자신에 대한 성찰, 투옥 이후의 고문과 폭력에 관한 섬뜩한 증언, 육신이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드문드문 반짝이는 인간적인 감정과 애수로 가득하다. 9년의 감옥생활 끝에 내가 만으로 한 살이 되던 해에 가석방된 그는 채 6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4년에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