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강진 유배 중 한동안 지냈던 주막집. 다산은 골방 하나를 빌려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붙였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 4가지를 바르게 한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2021년 2월 21일 방문 때 촬영)
이재우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인이었던 정약용은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라는 사학(邪學)죄인에 연루되었지만, 실상은 붕당정치의 피해자였다.
정적인 노론 벽파의 재상 서용보, 같은 남인이었던 이기경 등은 "정약용만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번번이 다산의 해배(유배에서 풀려남)를 막아섰다. 심지어 사헌부 장령 이안묵은 강진 현감으로 자청해 내려가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정적들에게 둘러싸인 다산이었기에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지대로 지킬 수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주역>에 '괄낭무구(括囊無咎)'라는 말이 나온다. '주머니의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다산은 이런 의미처럼 유배 동안에 '주머니 묶듯이' 스스로를 단속하고 경계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다산은 <주역>에 능했다. 강진 백련사의 콧대 높던 혜장 스님을 한방에 거꾸러트린 필살기도 <주역>이었다. 다산은 그런 혜장을 순치(馴致)시킨 후, 아이 '아(兒)' 자를 넣어 아암(兒庵)이란 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