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에 타계한 독립지사, 묘소도 남기지 못하다

[오늘의 독립운동가 24] 황정흠 , 유연태, 강윤국 지사

등록 2024.10.03 16:20수정 2024.10.0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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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주 광복단 기념관, 황정흠 지사 판결문

영주 광복단 기념관, 황정흠 지사 판결문 ⓒ 정만진, 국가보훈부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 천신(天神)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天)을 열고(開)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시'를 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모았다는 뜻이니, '개천'의 목적이 널리(弘) 사람(人間)들을 이롭게(益) 하려는 홍익인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서기전 2333년 음력 10월 3일,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 '조선'을 건국했다. (일연이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면서 조선은 고조선으로 일반화되었다.) 즉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09년 대종교(大倧敎)가 민족의식 고양을 목적으로 개천절을 만들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했다. 1948년까지 음력 10월 3일에 행사를 열던 개천절이 1949년부터 양력으로 바뀌었다. 이때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과 서기전 2333년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는 일이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냥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정했다.

경북 영주 풍기장날 만세시위 황정흠 지사

황정흠 지사는 1949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다. 1881년 경북 영주 안정면 생현리 400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8세였다. 1919년 4월 9일 영주 풍기 장날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3년 광복단이 풍기에서 결성되었다. 풍기 광복단은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등과 통합하여 광복회로 발전했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로 평가받는 광복회는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당연히 풍기에서도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용호·최성원·남영진·황정흠 등은 풍기 장날인 4월 9일을 거사일로 선택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참가자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았다.


황정흠은 거사 당일 오후 3시 30분쯤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만세현장에서 안용호 등 3명의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황정흠은 군중 10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 앞으로 달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재차 시위를 펼쳤다. 대구지방법원은 4월 19일 그에게 소위 '보안법'을 적용해 태형 90도를 언도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피체된 또 다른 황정흠 지사


황정흠(黃政欽) 지사가 시위를 펼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될 때, 또 다른 황정흠(黃鼎欽) 지사도 구속되었다. 제2의 황정흠 지사 또한 같은 영주 출신으로, 1889년 태어나 1956년 향년 67세에 타계했다.

제2의 황정흠 지사도 1919년 4월 9일 풍기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부 주도자들이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피체되자 제1의 황정흠 지사 등 100여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풍기 주재소 앞까지 달려가 시위를 계속했다. 대구지방법원은 그에게 소위 '보안법'을 적용해 징역 8월형을 언도했다.

a  안동 3.1운동 기념비, 강윤국 지사

안동 3.1운동 기념비, 강윤국 지사 ⓒ 국가보훈부


유연태(柳淵泰) 지사도 1957년 10월 3일 개천절에 타계했다. 경북 안동 임동면 수곡리 740번지에서 1884년 4월 18일 출생했으니 향년 73세였다. 1919년 3월 15일 열린 임동면 편향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해 경찰 주재소 건물을 부수고 물품을 훼손했다. (관련 기사: 7년마다 9월 27일에 순국한 안동의 지사들)

그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은 이른바 '소요·건조물 손괴·상해·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유연태 지사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은 유 지사를 소개하면서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제대로 된 묘소도 남기지 못한 독립지사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지막 의열 투쟁 '부민관 거사'

강윤국(康潤國) 지사는 1943년 5월 일본 천기(川岐) 소재 일본강관주식회사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이끌고 부당한 차별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농성시위를 감행했다. 그 일로 일제의 피체 위험이 닥쳐오자 몸을 피해 귀국했다.

1945년 5월 조문기·유만수·우동학·권준 등과 함께 서울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했다. 7월 24일 서울 부민관에서 조선총독·조선군 사령관과 친일파 거두 박춘금 등이 참석하는 소위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열린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일제 침략자와 친일 민족반역자 여럿을 한꺼번에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강윤국·조문기·유만수 등은 행사장인 부민관에 미리 잠입, 시한폭탄을 설치해 두었다.

이윽고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 2개의 폭탄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터지고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위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부민관 거사는 "일제 말기 한민족의 민족적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민관 거사 22일 뒤인 8월 15일 독립을 되찾았다. 부민관 거사를 일으킨 지사들은 그때까지 일제 경찰에 피체되지 않았다. 당연히 고문과 투옥을 겪지 않았다. 강윤국 지사는 2009년 10월 3일 향년 83세에 타계했다. 악랄한 고문과 옥살이를 피한 것이 천수를 누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황정흠 #유연태 #강윤국 #부민관 #조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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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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