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서문동에 위치해 있던 청주산선 사무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충북노회에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해체하고, 다시 부활시킨다고 했다가 무산된 것이 1974, 1975년이었다. 그런데 도시산업선교회 시찰 문제가 1975년 6월에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정진동은 자신의 신앙과 원칙대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지만 충북노회의 재정이 끊어진 상태였기에 청주산선의 살림살이는 옹색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이 벌어진 1973년부터 경찰서 정보과에서 정진동을 수시로 연행하고 감시했다. 정진동은 청주산선 살림살이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 청주시 사직동 집에 청주산선 사무실을 차린 것이다.
충북노회가 경찰의 탄압과 압박에 못 이겨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해체했지만, 지역의 일부 여론은 정진동에 우호적이었다. 특히 기독교장로회 청년·학생들이 그랬다. 청주제일교회 이연수·김형철·나채운과 서부교회 김치영, 청주 YMCA 회원 송창화(청주대 학생), 그리고 백승모(청주대), 정광옥(서남교회) 등이 청주산선 돕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1975년 9월이었다.
작은 천으로 패넌트를 제작했다. 천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밥)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라는 누가복음 4장 19절 말씀을 적어 넣었다. 도시산업선교회 정신을 천에 담은 것이다. 청년들은 청주 시내 각 교회를 다니며 패넌트를 판매했다.
청주 시내는 김치영 등이 주로 다녔고, 이연수는 전국 각지를 다녔다. 이 일로 인해 이연수는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노력이 커다란 성과를 내지 못할 때였다. 희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서 선교사 더스트가 패넌트 1000개를 주문했다. 청년·학생들이 발 벗고 나선 지 한 달이 채 안 된 10월 7일이었다.
이삿짐 싸기 전쟁
정진동은 사무실을 마냥 집에 둘 수는 없었다. 이때 서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은 이가 있었다. 활빈교회 전도사 김진홍(1941년생)이었다.
김진홍은 1971년 10월 3일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우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쳤다. 이후 청계천 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 남양만으로 내려가 두레마을을 세우고 개척 사업을 진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진홍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는데 경제적 지원을 해줬다. 이로 인해 정진동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활빈교회'라는 간판을 새로운 보금자리에 내걸었다. 1976년도였다. 김진홍의 지원은 그해에만 이뤄졌다.
하지만 시련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무실을 얻으면 경찰서 정보과에서 건물주를 찾아갔다. "정진동은 빨갱이오. 그에게 사무실을 빌려주면 당신이 큰코 다칠 줄 아시오"라고 협박을 했다. 그때부터 이삿짐 싸기와 사무실 임대 계약, 해지, 새로운 사무실 임대는 반복됐다.
"당신이 뭔데 함부로 간판을 떼는 거요!"
"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는 거요?"
"아무리 건물주라고는 하지만 계약기간이 있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계약금을 돌려주겠다는 것 아니오."
정진동과 건물주의 입씨름이었다. 잠시 흥분했지만 정진동은 이내 침착해졌다. 황당했지만 건물주 입장이 이해가 되어서였다. 그들도 경찰서 정보과의 압력에 의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