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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죽었나봐요"... 열매 없는 토마토에게 배운 것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면...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귀하다는 사실

등록 2024.10.25 11:31수정 2024.10.2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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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기 아직 살아있어요. 후우, 후우, 후우."


빨래를 널고 걷을 때, 창을 열고 닫을 때, 베란다 청소를 할 때, 사용한 텐트를 정리할 때, 새 욕실 세제를 꺼내러 갈 때, 앞 베란다에 볼일이 있어 나갈 때마다... 그 아이는 얘기한다.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음을. 아직 살아있음을. 거친 숨을 몰아 내쉴지언정 아직 초록빛을 잃지 않았음을. 토마토 이야기다.

이 아이와 나의 만남은 지난여름, 막내 딸아이의 방학식 날에 이루어졌다. 학기 중에 6학년 3반 친구 모두가 함께 토마토 씨를 심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의 화분에는 앙증맞은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데, 우리 아이 화분만 잠잠하다고 했다. 씨앗이 상했나 봐, 죽은 씨였나 봐... 속상함을 토로하던 아이를 보며 함께 속상했던 기억이 났다.

 키 작은 토마토 나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아직도 밤에는 호흡하고 낮에는 광합성을 하고 있답니다.
키 작은 토마토 나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아직도 밤에는 호흡하고 낮에는 광합성을 하고 있답니다.본인

그랬다. 처음 탄생부터 애를 먹였던 녀석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거의 포기할 즈음에 녀석은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고 했다. 그래도 죽은 건 아니었고, 상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때부터 우리 아이도 희망을 품었다. 좀 느리지만 언젠가는 빠알간 토마토를 적어도 하나는 맺어줄 거라고.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방학을 맞아 물품들을 챙겨올 때, 이 아이가 딸려 왔다.


"엄마, 얘 죽었어요. 버려줘."

딸아이의 미움을 잔뜩 받은 채. 던지듯 내려놓는 화분에는 새싹이라는 이름을 벗지 못한 키 작은 나무, 아니 잡초 같은 풀 두 개가 심겨 있었다.


아이를 속상하게 한 녀석이니, 내 사랑을 받을 리 만무했다. 여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은 거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 내 아이가 받았을 상처가 야속했다. 좀 힘을 내 보지, 한 개만이라도 꽃을 피워 보지, 방울토마토 하나쯤은 맺어줄 수 있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었니?

버리려 했다. 해가 지고 이파리에 힘이 없어졌을 때, 내일 아침 반드시 버릴 거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해가 찬란한 베란다 한구석에서 녀석이...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진하게 녹음을 발하고 있었다. 나 아직 살아있어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그냥 물을 주었다. '사랑해'(보통 식물을 키울 때 하곤 하는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 고꾸라질지 모를 녀석이니,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폭염 속에서 끝내 고개를 떨구겠지. 네까짓 게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무시와 조롱을 마음으로 보냈다.

최선을 다해 버티는 녀석, 뭉클하다

그런데 녀석은 아직도 우리 집 베란다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 무더운 나날을 견디는가 싶더니,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꽃도 피우지 못한 주제에, 열매도 맺지 못한 주제에! 최선을 다해 호흡하고,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쓸모가 없기에 죽은 취급을 당했던 하나의 존재가 포기가 아닌 최선을 선택한 것에 대한 숭고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아련함으로, 또 어느 날은 대견함으로 녀석을 바라보게 되었다.

푸른 잎이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내 초록빛이 아름답지 않나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초록빛을 선물해 줄게요. 저를 보며 기뻐해 주세요,라는 듯이.

녀석의 목적은 다른 녀석들과 다른 것이었던 게 아닐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만이 씨앗의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 인생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 아이는 삶에 대한 예를 다 갖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선을 다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녀석을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딸아이의 마음에 실망감을 안겨 주었지만, 끝내 "우아, 아직도 살아있네?"라는 경탄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남들과 다르지만, 나름의 최선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닫는다.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고귀하며, 열매를 꼭 맺지 않더라도 열매 못지않은 기쁨을 선사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독한 겨울이 코앞까지 왔다. 이 초록빛 아이는 그때 생명을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힘이 소진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제는 무시나 조롱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수고했다고, 잘해왔다고, 너로 인해 정말 기뻤다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페이스북 그룹에도 실립니다. 내 인생의 열매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무기력한 분들께 위로가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토마토나무 #꽃도열매도없는 #여전히살아숨쉬는 #생명자체만으로 #큰기쁨을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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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7권의 웹소설 e북 출간 경력 있음. 현재 '쓰고뱉다'라는 글쓰기 공동체에서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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