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희의 딸 정숙항정종희 선생의 딸 정숙항 씨가 정해룡 선생의 연보를 낭독하는 모습이다.
강승혁
봉강 정해룡은 1913년 7월 2일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정종익과 윤초평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이었던 반곡 정경달을 배출한 영성 정씨 사평공파의 장손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3000석 규모의 대지주 집안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춘궁기와 흉년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베푸는 가풍을 보며 자랐다. 동생 정해진은 경성제대와 동경제대에서 공부했으나 그는 '장손을 일제에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뜻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두어 신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대지주의 집안이면서도 양조장, 인쇄소 등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모았으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점차 재산을 소진했다. 한편으론 민족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 인촌 김성수를 통해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 발전기금을 기부했다. 그 후 고향 보성에 '양정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재, 학용품을 무상 제공했다.
해방 뒤에는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지역위원장이었으며,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겸 재정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여운형은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한의 우익 세력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해룡은 이를 따랐다. 이때 정해룡은 독립과 통일에 좌우가 없다는 신념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국토 분단은 정해룡 일가의 몰락을 초래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인민공화국에 협조했던 일가친척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살되기도 했다.
1980년 11월 정씨 일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던 아우 정해진이 1965년 8월 봉강리에 몰래 찾아온 그것이 발단됐다. 정해진은 정해룡의 셋째 아들 정춘상과 북으로 갔는데, 정춘상은 보름 후에 김일성 친서와 소련제 기관단총, 난수표, 공작금을 들고 귀향한다. 1967년 이들을 통한 공작사업이 성과를 보이지 않자, 정해진이 한 번 더 봉강리에 찾아오기도 했으나 2년 뒤인 1969년 10월 31일 정해룡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정해룡의 일가 수십명이 체포되고 1985년 월북했던 정춘상은 사형이 집행됐다. 정해룡의 숙부 정종희는 무기징역, 6남 정길상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