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말』지 기자가 '국정원 끄나풀'로 낙인찍혔다. 한국정치 최대의 '트러블메이커'이자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숱한 고문수사 의혹의 장본인이었던 정형근 의원을 취재하던 중(『말』 2000년 1월호「추적―정형근의 야망과 색깔, 빗나간 엘리트주의와 권력욕 그 위험한 만남」 기사 참조)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간첩이나 돕는 국정원 끄나풀"이란 폭언을 듣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당했던 것이다.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태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99년 12월 7일 서울 서초동 정형근 의원 집 앞. 수십 억대의 으리으리한 고급빌라가 즐비한 교대정문 부근의 빌라촌인 그 곳은 골목마다 대형승용차가 넘쳐 났다. 인적 드문 골목길엔 정 의원 측의 요청으로 10월말부터 사복경찰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쓰고 있었다.
그 날 기자와 KBS 추적60분 취재팀(12월 16일 방영된 '고문의 배후―밝혀지지 않는 이유' 취재팀)은 정형근 의원 인터뷰를 위해 집 앞에서 계속 대기 중이었다. 오전에 있었던 국회법사위에 불참한 정 의원이 집에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이미 검찰은 서경원 의원 고문수사혐의와 언론대책 문건 등과 관련해정 의원에게 9차 소환을 해 둔 상태였다.
저녁 7시 20분경 한나라당 이신범, 김영선 의원이 정 의원 집을 찾았다. 정형근 의원이 집안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9시 10분쯤 이번엔 부산의 정의화 의원이 집 앞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그는 "일은 무슨, 그냥 소주나 한 잔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검찰 출두 문제로 대책회의를 하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는 "넘겨짚지 마라, 아무 일 없다"며 잘라 말했다.
정의화 의원이 집으로 들어간 뒤 얼마 후 이신범 의원이 나왔다. 그는 대뜸 "본인이 인터뷰를 거절한다잖아, 이런 식으로 취재해도 되는 거야, 신분증 내놔봐, 기자 맞아?"하며 강력하게 따졌다. 이에 "검찰소환 방침에 대한 정형근 의원의 입장을 들으려 한다"고 말하자 "국정원 부탁 받고 온 거 다 안다"면서경찰들에게 기자일행을 몰아낼 것을 요구했다. 김영선 의원은 카메라를 들고 나와 기자일행을 계속 찍으면서 "간첩 도와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 국정원 끄나풀들, 이건 명백한 야당탄압이야!"라며 목청을 높였다.
기자일행과 옥신각신하다 이신범 의원은 추적60분 이도경 PD의 녹음기를 탈취했고, 경찰들도 기자 일행을 강력 저지하며 나섰다. KBS ENG카메라 기자와 『말』 사진기자가 이 광경을 담으려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 ENG카메라가 떨어져 깨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밤 11시가 넘어 이신범 의원 등은 정형근 의원 집을 떠나면서 "내일 국회에서 따지겠다"고 말했다. 결국다음 날인 12월 8일 이신범, 김영선 의원은 국회예결위에서 신상발언을 통해 "KBS와 『말』 기자가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며 예결위를 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울법대 시절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으로 네 차례나 옥고를 치렀던 이신범 의원과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시절 시민운동에도 적극 나섰던 김영선 의원(김 의원은 정형근 의원의 초등학교 후배이다). 고문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야당탄압이라 하고, 이를 취재하는 기자를 국정원 끄나풀로 몰아붙이는 두 사람도 결국 정형근 의원을 닮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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