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분노뿐이다 (16)

등록 2000.03.03 09:46수정 2003.10.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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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늙은이와 여자를 계곡에서 끌어내면서, 그 두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 두었다. 여자는 계속해서 제발 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자질이나 하는 그런 나쁜 놈은 아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말했다. 늙은이는 벌벌 떨면서 그저 말끝마다 예 예라고 대답했다. 늙은이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우리는 늙은이와 여자를 돌려보낸 뒤, 곧 현장을 떠났다. 늙은이는 다음 날, 내가 지정해 준 통장으로 돈을 입금시켰다.


은행에서 찾아온 돈을 보고 나서 나는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다. 그 돈은 은행에서 만든 속이 깊고 통이 큰 널찍한 사각봉투에 묵직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런 돈을 처음 만져보는 나로서는 그 액수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 돈을 만져보며, 조만간 여동생을 기쁘게 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취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음 순간,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그렇게 큰 돈을 처음 만져본 데다가, 돈이라는 것에 그렇게까지 집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그 돈을 무리 중의 한 녀석에게 맡겨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돈이라는 것에 발이 달려 있어서 저 혼자 몰래 어디론가 달아나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 활동하는 올빼미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폐가에 들어앉아 갈아입고 버린 옷만 한 보따리였다. 그러자 처음엔 어디 유원지에라도 놀러가는 것처럼 들떠 있던 녀석들이 어둡고 습습한 숲 속에 들어앉아 생각지도 않았던 야인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 사는 것이 자유롭기는 했지만, 집에서 부모가 해주는 따뜻한 밥 먹고 살던 놈들에겐 찬물 한 그릇 맘대로 퍼다 쓸 수 없는 숲 속 생활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을 맡아서 관리하던 녀석이 숲에서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녀석은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놈이었다. 나는 녀석이 그 많은 돈을 갖고 도망친 것보다 나와 조직을 배반하고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꽁무니를 내뺀 것에 더 분개했다. 내 생각에 돈 몇 푼에 의리를 판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 후로 돈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리 중의 누군가가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고, 누군가가 또 그것을 따로 모아 관리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 누군가가 누구이며, 그동안 얼만만큼의 돈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쯤, 나는 오로지 내 앞에 붙들려온 인간들을 짐승처럼 패대기치는 일에 광분하고 있었다.

그런 생활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돈써대는 일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내들을 두들겨 패고, 그런 사내들의 사타구니나 핥고 다니는 여자들의 머리 속에 악몽을 심어주는 그런 짓거리들이 심심찮은 일상처럼 되풀이되던 어느 날이었다.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간 놈이 해가 저물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그 녀석 역시 돈을 가지고 달아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수없게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도망치자고 말한 건 다른 녀석이었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하룻밤만 더 기다려 본 뒤에 결정을 내리자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주위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게 남겨진 건 땀에 절은 더러운 옷 한 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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