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 파도가 흰눈처럼 쓰러지는 태종대 절벽은 절경이다.범어사의 선 향기 그윽한 풍광은 또 어떤가.부산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한결 아름답다.일찍이 작가 전혜린도 고백했다.
"눈에서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부산 사람이 내 마음에 꼭 든다."
영남정권 운운하지만 끝 모를 유신체제에 조종을 울린 것은 부마항쟁이다.더구나 부산은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고 박종철의 고향이기도 하다.서울 하숙집에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부산의 아들 박종철은 6월 대항쟁의 불꽃이었다.
세월의 이끼 탓일까.그 민주의 땅에서 반민주인사가 '부산의 아들'로 칭송받고 있다.누구일까.정형근 의원이다.언론 문건 거짓 폭로에 이어 근거없는 '색깔공작'에 나선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한테서 "부산의 아들"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물론 반민주인사가 '민주의 아들'이 된 까닭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한밤 긴급체포 시도가 상징하 듯 김대중 정권의 '자충수'도 한몫 거들었다.하지만 근본원인은 아무래도 지역감정이다.
이미 정씨 쪽은'반김대중 정서'에 색깔을 덧칠해 지역여론을 몰아가고 있다.일부 수구언론 또한 겉으론 지역감정을 우려한다면서 은밀하게 이를 퍼뜨리는 교묘한 편집에 나섰다.
두루 알다시피 지역감정은 남북으로 갈라진 겨레를 다시 조각조각 내는 망국병이다.그 골이 우리 정치에서 깊어진 주요 원인이 박정희 정권의 지역차별과 선거전략에 있음은 물론이다.그러나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김 대통령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다.그가 1987년 단일야당을 깨고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지역감정 여론이 한층 악화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선거 때마다 바람을 일으키는 지역감정은 가히 절망적이다.새천년 첫 총선에서도 그 창백한 유령이 배회하는 풍경은 나라의 앞길을 캄캄하게 한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성패도 기실 수구언론이 부추기는 지역감정에 달려 있다.그 점에서 부산 북.강서구는 4월총선의 시금석이다.공천 부적격자로 꼽힌 정의원은 색깔섞인 지역감정 바람을 타고 있다.북.강서갑에서 재선이 확실하단다.
반면 재선이 손쉬운 서울을 떠나 북.강서을로 내려온 노무현 의원은 그 바람에 맞서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비단 지역감정을 대하는 자세만이 아니다.한 살 차이로 부산에서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한 사람이 인권변호사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을 벌일 때 한 사람은 정확히 대칭점에 있었다.군사독재정권의 정보기관 요직에 앉아 민주세력 탄압과 고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여북하면 17명의 민주인사들이 '정형근에게 짓밟힌 사람들의 모임'까지 만들었겠는가.
더구나 총선연대가 정씨를 공천 부적격자로 꼽은 사유는 한층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공표된 '반개혁의 전력'은 다름아닌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였다.예서 옷깃을 여미며 묻지 않을 수 없다.누가 감히 정씨를 일러 '부산의 아들'이라 하는가.
정치란 본디 그런 것이라거나 지역감정 탓으로 넘어가기엔 박종철 그 아름다운 청년이 눈에 밟힌다.정씨는 최근 "미친 바람이 불고 있다"고 외쳤다."미친 바람이 불 때는 해명을 해본들 바람에 묻혀 쓰러져간다"는 대목에선 얼핏 '의연함'마저 느껴진다.좌익광풍,좌익광란의 시대란다.그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총선을 앞둔 오늘 널뛰 듯 불고 있는 미친 바람은 좌익광풍이 아니다.지역감정이다.
부산에서 '반김대중 정서'가 높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정서와 정씨 문제는 전혀 별개의 차원이다.하물며 "부산에 맹주가 없다"든지 "정형근을 청와대로" 따위의 구호가 등장하는 현실은 눈먼 바람임이 틀림없다.그 미친 바람을 잠재울 사람은 누구인가.'눈에서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부산사람들' 아니면 누가 있을까.소금 머금은 바닷바람이 그립다.
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 2월 24일에 실린 <손석춘의 여론읽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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