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박하사탕을 사러 간다

화이트데이 이 땅의 모든 님들에게

등록 2000.03.14 10:21수정 2000.03.1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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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박하사탕을 사러 갑니다. 영화 박하사탕에 감동해서 박하사탕을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박하사탕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화이트데이랍니다. 오늘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니 한 사내가 화려하게 포장된 사탕바구니를 들고서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걷더라구요. 마음 속으로 "저 사탕바구니를 받는 여성은 누구일까? 받으면 몹시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출근을 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 보니 여성동료의 책상 위에는 앙증맞게 생긴 작은 병 안에 예쁜 별사탕이 담겨 있는 화이트데이 선물이 놓여져 있습니다. 입사한 지 몇달 안된 새내기 신입사원이 올려 놓은 거라나요.

"역시 새내기들은 뭔가 달라"라며 선물을 받은 여성사원이 즐거워 하면서 말합니다. 그녀는 태어나서 사탕을 정식으로 받아본 거는 처음이라나요. 학교 다닐 때 그녀가 받아본 화이트데이 선물은 기껏해야 선배가 호주머니에서 꺼내 "야, 먹어라"하며 던져주는 사탕이 전부였다나요.

화이트데이.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주는 날. 여기저기서 "사탕 안 주냐"는 압력성 발언에 남자들은 은근히 부담이 되는 날. 안 주고 넘어가자니 미안하고, 또 누군 주고, 누군 안 주면 섭섭해 할테고. 그러면 천원짜리 사탕이라도 사서, 나눠 줘?


상업적 목적하에 생겨났다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뿐만 아니다. (애인이 없는) 놈들은 블랙데이(4월 14일)에 모여서 짜장면 먹는다는 자조적인 기념일까지 생겨난 지 오래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지난번 발렌타인데이에 나에게 선물을 줬다. 그녀는 허례허식하는 초코렛바구니보다 실용성있는 선물을 사 줬다. 면도용 거품(이름을 모르겠네요)과 면도후에 바르는 로션이었다. 난 매일 면도후에 로션을 바르면서 그녀의 사랑을 느끼고 있다.


나는 지금 박하사탕을 사러 간다. 그녀는 박하사탕 한 봉지랑 편지 하나를 써 주면 너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활달하고 씩씩하다. 하지만 어제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선배, 봄은 언제 오나요"라며 마음 한 구석에 아직 겨울같은 음울함이 있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난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여 봄은 와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나의 문필력(?)을 발휘했다. 세태에 휩쓸려 줏대없이 사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너무 완고하게 세상의 변화를 무시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정성이 담긴 마음으로 허례허식하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한 통의 편지와 박하사탕 한 봉지라면 괜찮지 않을까.

긴 겨울 뚫고 남녘의 강산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란다. 물결지어 오는 봄꽃의 무리는 머지 않아 갈라져 있는 한반도의 철책을 넘어 북상해 갈 것이다. 화이트데이. 온 세상이 참으로 화이트하게 되길 소망하면서 이 땅의 모든 님들에게 글 하나 보냅니다.

아참, 군더더기 말 한마디 합니다. "젊은 연인들이시여, 초코렛도 좋고, 사탕도 좋지만 우리 농산물 많이 사 먹읍시다. 지금 귤값이 떨어져 제주도 농민이 죽을 지경이랍니다. 오늘 귤 천원어치라도 사 연인에게 까서 입에 넣어 줍시다요!"


<그대여 봄은 와 있습니다>


그대여 봄은 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겨울의 한 벌판 쪽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지 않나요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고드름 같이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겨울의 눈보라를 날리고 있지 않나요

부드러운 팔을 뻗어 개나리 뻗어오는 언덕
남쪽의 하늘 위로 보세요 거기
벌써 봄이 와 해맑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 오고 있습니다

간밤의 침울한 안개를 걷고
마음의 호수를 열어 저기 나래짓 하는 봄의 신령을 보세요
마음은 늘 봄이에요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과 흙과 강과 푸른 하늘에
언제나 마음은 봄이랍니다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웅크린 몸을 일으키고
낮게 침묵하고 있는 마음의 창을 열어 보면
해맑게 웃고 있는 그대의 사람과 함께
봄은 벌써 와 있습니다

아니, 늘 나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주는
그대가 생동하며 꿈틀거리는 생명의 봄,
나의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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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받았냐고? 무슨 화이트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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