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을 앞두고 언론의 취재 열기가 어느 역대 총선의 열기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유권자들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혹은 자신의 주권을 어떻게 행사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소위 유권자의 표심이라고 한다면 언론의 관심은 이에 대하여 일찌감치 비켜나 있는 듯이 보인다.
소위, 민주당과 자민련 공동여당의 갈등, 한나라당과 민국당의 갈등, 그리고 정강 정책상 별로 다를 것 없는 4당의 지지율을 놓고 열심히 지면을 채우고 있는 한국의 언론들은 이미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쏟아졌던 유권자의 뜨거운 관심따위는 이미 취재 대상이 아닌 듯하다.
각 언론사의 보도에 주요 취재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소위 386과 각 정당 중진과의 대결이다. 또는 386의 정계 진출 가능성이다.
민주당에도, 한나라당에도, 자민련에도, 민국당에도 386은 있다.
이들은 대학 시절부터 훤칠한 외모에, 매끈한 언변으로 동료 학생들을 사로잡은 스타였었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의 스타일런지도 모른다. 쟁점이 부재한 선거판에 등장한 새로운 메뉴로서, 연예가의 스타 시스템처럼 만들어진 스타일런지도 모른다.
'386'이 부정 부패로 얼룩진 선거판에 스타로 등장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 정치의 마지막 희극이자 비극일 수 있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기성 정치권의 부도덕, 부정, 불의를 치장하고 꾸밀 수 있었겠는가?
다수의 이익을 철지히 외면하며 소수자의 부당한 전횡을 정당화하는 그 모든 정치, 경제, 사회 행위가 개혁으로 꾸며질 수 있었겠는가?
'386'이 화려하게 기성 정치권의 새로운 스타로 데뷔하는 것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기성 정치권의 부정과 부패, 무능과 독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없어진 재야로도, 소위 전문가 엘리트로도, 능력있는 학자나 관료도도 감출 수 없는 그 치부를 감추어줄 마지막 방패로 '386'은 등장한 것이다.
그 대가는 상식과 양심의 침몰이자 실종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의 열사들을 거론하는 그 후안무치앞에 상식과 양심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그들은 상식과 양심을 견지하려 애써온 동시대인들을 간단하게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8~90년대에 그토록 떠들었던 '민중'은 조롱당한 상식과 양심앞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
100만 학도의 대표며, 4천만 민중의 대표를 운위했던 그들이 간단하게 그 다수자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정파 -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지지율이 30%도 안되는 정당, 그것도 정강, 정책, 이념과 노선이 일치하지 않는 그런 정파가 소수정파가 아닌가?-의 맹주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상식과 양심을 간단하게 배반하게 되는 광경앞에 과거 그들의 연설과 감옥행에 박수와 죄의식을 함께 가졌던 다수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당혹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이러한 현실속에서 대다수 언론이 외면하는 소수정당, 혹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이들이 있다.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 혹은 더 이름없는 정당, 혹은 무소속의 소속으로 출마하는 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영예롭다.
다수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기꺼이 소수자를 자임한 이들은 아름답다. 이들이 다수작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애쓰는 한 영원한 소수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과 양심, 정의를 고수하려는 이들은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 영예롭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들에 앞서서 그러한 길을 걸었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상식과 양심을 유린하는 세력과 함께 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수자 - 바로 유권자이며 이 땅의 주인인 - 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자, 민중을 내세웠지만 알량한 운동권 정파나 써클의 이해관계를 때때로 우위에 놓으면서 교만에 찬 모습으로 실지로는 민을 무시하고 깔보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기꺼이 소수자의 영예로움을 택한 이들은 단지 그 영예로움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자신만이 다수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고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수자 자신이 다수자의 대표이며, 주권자의 주권을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진리를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민은 언제나 상식과 양심의 실현을 요구해 왔다. 그 요구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다수자를 대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실현할 의무가 있다. 다수자를 대변하려고 하는 그 순간 그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 총선은 코앞에 닥쳐있다. 다수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싸웠노라는 무용담으로 자위할 것인가? 아니다, 상식과 양심의 실현을 바라는 절대 다수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승리를 얻어야 한다.
우선 기성정치권에 대항하여 출마한 이들에게 큰 박수와 함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더 큰 마음과 자세를 요구한다. 상식과 양심을 지키려는 절대 다수의 결집과 단합을 위해 작지 않은 큰 차이(?)를 과감히 버리고 국민의 이름을 빌어 국민을 기만하고 배신한 무리들, 386의 이름으로 동시대인들을 조롱한 거짓된 무리들, 국리민복은 외면한 채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 세월을 보내는 무리들을 분명히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상식과 양심을 견지하려는 모든 정당, 정파, 시민사회단체, 개인들의 결집과 단합을 간절히 호소한다. 이를 위해 우선 용감한 출마자들이 먼저 나서시라.
이것이 다수자 자신의 간절한 요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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