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미국 사는 이야기>8

약사는 의사의 '꼬봉'?

등록 2000.03.22 14:02수정 2000.03.2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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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되게 아팠다.


미국와서 한동안은 맑은 공기 덕분에 병 걸릴 일이 없었지.
한국에선 매일 감기에 결막염에 한 달이 멀다 하고 병원 들락거리며 돈 깨나 썼는데 여기 와서 7년간은 감기 한번 앓은 적 없다.
아기 낳느라고 병원 찾은 일 외에는 기억이 없으니까.

그런데 3년 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어.
쉴 만하면 받쳐오는 기침에 가려움증까지.
바로 알러지 때문이지.
다른 기후와 문화속에 여러가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생기는 알러지는 3년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나타난다지 아마.

나는 7년이나 되어도 괜찮길래 안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작됐어.
미국에서는 알러지로 고생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게 걸려보니까 참 은근히 사람을 잡는다.

각설하고 한동안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가슴이 많이 아파와서 섬찟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나같은 서민이 병원을 찾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보험이 없는 서민들은 아이들 많이 아프면 겨우 병원을 찾고 본인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지 않고는 병원출입을 한참 망설인다.

그 이유는
첫째, 한 번 가면 의사 진료비만 최소 60달러에서 보통 1백달러 이상.
둘째, 이것저것 검사를 하거나 X-ray 촬영을 하려면 그게 또 수 백달러.
셋째, 보험 없으면 약값도 엄청 비싸
이것 저것 더하면 몇 백달러에서 몇 천달러는 우습게 깨지게 마련이거든.


미국의 의료체계는 정말 영점 짜리다.
터무니없는 의료수가는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실패한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하는 최악의 케이스지.
부자들은 비싼 보험을 사서 아무 문제없이 생명을 연장하기도 하는데 서민들은 보험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니까.
한국도 '미국의 경우에 의하면'을 강조해 의약분업까지는 좋은데 의료 체계마저 미국식으로 바뀔까 지레 걱정도 된다.

한국의 국민의료보험이 정말 좋았다는 게 여기 오면 열 배 이상으로 실감이 나지.
특히 치과 비용은 엄청 비싸 이빨하나 뽑는데 1천달러 이상이라서 그 돈으로 비행기타고 한국가서 이빨 치료하는 사람들 많고.
요즘에는 LA로 가서 한다더라.
LA 한국치과들이 싼 가격에 한인들을 치료해 준다고 해서.


한국사람 많은 도시에서 살면 그런 것은 좋은 것 같아.
아픈 내용을 영어로 정확히 설명하기도 어렵고 의료 관계 전문용어를 영어로 알아듣기는 더욱 힘든 한국사람들이 같은 말 쓰는 한국 병원을 찾을 수 있는 편리도 있고.
한국 약국도 이용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그 여러가지 중에는 거기서 한참 논쟁중인 의약분리를 경우에 따라 안할 수도(?) 있다는 점도 있다.
한국에서 하던 버릇을 못 버려 여기 와서도 약국에 가서 감기약 정도는 의사 처방없이 그냥 지으려 하는 사람들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주는 약국도 간혹 있거든.

특히 항생제는 의사 처방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여기 사정으로 한국에서 박스째 항생제를 구입해 들여와 두고 먹는 집이 여럿이다. 우리도 물론 그런 적 있고.
그런데 한국 약국에서 사온 그 항생제들이 모두 3차 항생제라니.
여기 사람들이 알면 깜짝 놀랄 일이지.

이민온 지 얼마 안돼 아이들 감기때문에 소아과 들락거리면서 주사 안 주는 환경에 적응하는데 한참 걸렸다 나도.
8년 동안 아이 둘 키우면서 예방주사 말고는 주사 맞춰본 적 없다면 믿겠니?
근데 그래, 여기는.
열 많이 나고 보통 염증에도 1차 항생제가 고작이지.
그래도 꾸준히 그 약 먹으면 열흘 안에 다 낫는다.
주사 안 맞고 3차 항생제 안 먹어도.

그래, 병원 갔다 약 지은 얘기할께.

의사가 그러더군.
알러지로 기침이 너무 심해서 그러니까 일단은 기침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알러지 약을 처방해 주는데 알약을 원하는지 물약을 원하는지 묻더라구.
알약이 더 좋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처방전을 쓰면서
"이 약은 마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취급 안하는 약국이 많을 겁니다. 아마 몇 군데 확인하셔야 할 지 모르겠군요. 만일을 위해 하나 더 써 드리지요. 알약을 구하기 힘들면 이 물약으로 달라고 해 보세요"
라고 친절하게 얘기해 주네.
고맙다고 하고 두 개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갔지.

의사의 말대로 처음 약은 없었어. 세 군데를 돌았는데 없더군.
세 번째 약국에서는 백인 남자 약사가 똑같은 약인데 알약은 없고 물약만 있다면서 내게 처방전을 써 준 의사에게 전화를 하는 거야.
그 때가 토요일 저녁이었으니 당연히 의사는 병원에 없었지.

"똑같은 약인데 그냥 주시면 안되나요?"
내가 물었지.

"안됩니다. 꼭 담당의사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써 준 처방전을 내밀고
"그럼, 이걸로 주세요. 의사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찾기 힘들지 모른다구요. 그럴 경우를 위해 하나 더 써주던데요."
하고는 결국 먹기 싫은 물약을 들고 나왔지.

그런데 똑같은 약이라도 알약을 물약으로 대신하는 것도 의사에게 전화를 하는 약사를 보면서 나는 전혀 그가 의사 '꼬봉'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의사의 소견을 묻는 모습에서 오히려 환자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읽었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사실 그네들은 '환자보호'니 '의사존중'이니를 떠나 그저 몸에 배이고 생각에 박힌 대로하는 행동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지.

어쨌든 여기 약사들 의사 처방전 받아 조제하면서 최소한 자기가 "의사 꼬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다.
그 약사에게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여기 사람들 자주 쓰는 말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모든 직업은 독특한(unique) 것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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