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뽀뽀 같은 첫키스를 원했다

그러나 그이는 밤키스 같은 첫 키스를 해왔다

등록 2000.04.03 15:21수정 2000.04.0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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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미국 사는 이야기> 열번째는 키스 이야기다.


4월의 비는 겨우내 묵은 때를 말갛게 벗겨내고 봄은 좀더 구체적으로 색깔을 입기 시작했다. 체리꽃잎들이 흩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봄은 체리꽃 색깔 같던 서곡을 끝내고 활기찬 1악장을 연주하고 있어.

연두로, 연초록으로, 초록으로,
가서 냄새를 맡으면 코끝에 초록물이 들 것 같은 초초록으로.
연분홍으로, 분홍으로, 진분홍으로, 진홍으로,
눈이 아프게 찔러오는 진진홍으로.

그런 날 베토벤의 피아노 컨쩨르토 5번 '황제' 제 2악장, 숨을 깊이 들이쉬고 눈을 감고 몰입하게 만드는 그 피아노 선율 속에서 첫 키스를 회상해 보는 기분도 나쁘진 않다.

첫 키스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인데 첫 키스의 기억을 좀처럼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첫 키스의 추억이란 나만의 기억으로 가슴 한 켠 그대로 묻어두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성(聖)스러운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사랑이 알면 난처할 만큼 성(性)스러운 것이기 때문일까.


하여간 요즈음 사는 이야기 주제가 생각만큼 활발하지 않네.
나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부담감마저 느끼며 얘기를 꺼낸다. 첫 키스의 대상과 지금 사랑의 대상이 같다는 점에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겠나 해서.

"나의 첫 키스는 뭉클했다."


이렇게 말하면 뭐 그리 감동적이었느냐고 물어올 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뭉클했다는 뜻이 아니고 내 입 속에 들어온 그의 혀가 뭉클했다는 뜻이야.

대학 2학년, 어느 공원, 오후 다섯 시쯤.
급작스런 그의 키스는 '이런 걸 첫 키스의 기억으로 간직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뭉클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어떻게 그의 뭉클한 혀가 내 악다문 이빨 사이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날아갈 만큼 상큼하지도 그렇다고 가슴 떨리고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이지도 않았던 내 첫사랑과의 첫 키스.
이런 걸 정말 첫 키스의 기억으로 남겨둬야 하는건가.
신고 나갔던 내 빨간 구두만 밤새 원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7년 연애와 결혼 10년.
첫 키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밤 키스를 지나 오늘 아침 얻은 결론은 그이는 밤 키스 같은 첫 키스를 원했고 나는 아침 뽀뽀 같은 첫 키스를 원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아침 뽀뽀를 하거든.
시작한 이유는 또, 내 딸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사는 한국 딸들이 자라서 연애를 할 나이가 되면 한국 남성보다는 미국 남성을 더 선호한다는 얘기를 그 애가 두 살쯤 되었을 때 들었거든.
그런데 그 이유가 하도 그럴 듯 해서.

대체로 무뚝뚝, 집안 일에 엄마를 별로 도와주지도 않을 뿐더러 사랑표현에 구체적이지 못한 한국 아버지들을 보고 자라는 딸들은 자기 아빠같은 신랑감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면서 덜컹 외국인 데이트 상대를 집으로 데려 온다는 거야.
"아빠를 보면 한국 남자랑 결혼하기 싫어."

수시로 꽃을 갖다 바치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미국 청년들.
어쩌다 엇갈려 돌아서는 날이 오더라도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즐기며 사는 미국 남자들.

거기에 비해 집안에서 엄마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고 '나한테도 스위트하게,
"I love you."
한번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 우리 아빠'가 한국 남자를 보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야.

그리고는 엉뚱하게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거지.
한국 남자들이 다 우리아빠 같으면 결혼하기 싫다고.

이제 여덟 살이지만 10년쯤 후에 어쩌면 더 일찍, 덜컥 금발의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면 어쩌나 싶어 언제부턴가 우리도 적극적으로 사랑 표현하면서 살기로 했다.

사랑한다는데 뭐 금발이건 흑발이건 꼭 따져 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청년하고 결혼해야 사위에게 닭 잡아 주는 장인 장모의 애틋한 사랑 표현을 맘놓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어쨌든 애들 앞에서 구체적인 사랑 표현을 하기로 한 우리들의 실천사항중의 하나가 아침 뽀뽀다.
남편이나 나나 직장에 나가기 전에 서로 뽀뽀하기.

생활 속에서 하는 구체적인 사랑 표현이라는 것이 미국 사람들 쫓아가려면 아직까지도 서툰 점이 많지만 아침 뽀뽀만큼은 이제 생활이 되어간다.

오늘도 했거든.
살짝 껴안고 뺨이나 목에 아니면 입술에 가볍게.
그거 하면 확실히 하루가 다르다.
시작하는 아침 기분이 가벼워지거든.

아귀다툼 세상에서 볶임질을 당하며 하루종일 지속효과까지야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시작하는 기분이 좋으면 절반은 세상을 이기고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아서 빼지 않고 하지.

오늘 아침, 잊어 먹은 듯 출근하는 남편을 돌려세워
"뽀뽀"
하면서 얼굴을 들이댔지.
뽀뽀하고 돌아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 나는 아침 뽀뽀 같은 첫 키스를 원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상큼하고 가볍고 이렇게 기분좋게 마음까지 환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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