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과 아줌마 본연의 임무 사이

총선 막바지, 나의 하루는 이러하였습니다

등록 2000.04.12 02:51수정 2000.04.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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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남편의 외할머니 생신이라 서둘러 출근준비를 한다. 다른 때 같으면 '동창이 밝았느냐, 나하곤 상관없다. 노고지리야 우짖지 마라, 우리는 더 자야된다!'를 외칠 시간이지만 오늘은 짤없이 일어나 머리를 감는다. 시댁에서 아침을 먹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7시, 안양으로 가는 길은 시원하게 뚫려 있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제치고 잠시라도 눈을 붙일 채비를 갖춰보지만 이내 포기한다. 라디오 볼륨을 슬쩍 올리며 안면방해를 시작하는 남편의 작전이 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그래, 운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참자.

8시, 안양에서 아침준비를 구경하다(바쁜 며느리에게 아무 심부름도 시키지 않는 천사같은 우리 어머님. 만세!) 잽싸게 한 그릇 비우고 일어난다. 모처럼 미역국에 쌀밥을 먹으니 하루를 거뜬히 견뎌낼 듯, 전장에 나가는 장수마냥 용기 백배한 '캠코더 며느리'.(어머님은 아직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지 잘 모르신다.)

지갑을 열어 외할머니와 큰이모님(시골에서 외할머니 뵈러 상경했음.)께 용돈을 드릴 때까진 룰루랄라 참 좋았다. 현관에 내려선 순간, '도대체 애는 언제 낳을거냐, 돈 벌어서 가질려고 늦추면 애도 고생하고 니도 고생한다'는 작은 이모님(시댁 근처에 사신다.)말씀이 구두코에 걸리더니, 기다렸다는 듯 차가 막힌다. 차도 밀리고 속도 터진다.

총선연대 자원활동가들이 출근하는 장면을 찍어보려고(기사에는 안올렸지만 자원활동가들의 일하는 모습과 인터뷰를 촬영하고 있다.)여러번 벼렀지만 늘 시도에서 그쳤다. 오늘은 새벽같이 서둘러서 드디어 가능하려니 생각했는데, 역시 무산되고 만다. 정말 애 하나 낳고 말아? 애 보면서 참한 마누라, 참한 며느리로 함 살아봐?
그래서 이런 고생 마감해? 마감해? 좀만 더 기회를 보자, 그래봐야 내일 뿐이지만.

10시, 총선연대 사무실 도착. 브리핑을 기다리는 기자 두엇이 밀담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험악하다. 전화벨을 죽어라 울리는데, 다들 전화기 근처에 가는 걸 두려워한다. 이상하다? 전화에 살고 전화에 죽는 전화상담 전문가들이 웬일? 그렇다면, 이 사태를 직접 알아보자. 겁없이 척 받았더니 대뜸 상소리가 날아온다.

"야, 거기 뭐하는 데야? 넌 뭐하는 *이야? 이래도 돼?"
오잉? 두리번거리며 구조요청을 하는데 전화받기 최고참 강주효 아저씨, 요상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만 한다. 왜 이러지? 눈짓을 보내자, 손을 휘휘 저으며 모른 척 한다.


"무슨 일이신가요?"
"야이 0같은 놈들아, 아침부터 왜 남의 차 백미러에 스티커를 0같이 붙여놓고 0랄이야?"
"네? 저희들은 시민들께 불편을 드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차에다 붙이다뇨? 총선연대 스티커가 맞나요?"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아침부터 거기에 전화하겠어? 뭐 좀 한다 싶었더니 뭐하자는 거야?"

10시 30분. 자원활동가들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이은 항의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이 항의전화의 행렬은 강동구 성내동 천호동 등촌동 일대 시민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브리핑이 시작되고 다 마치는 순간까지 단 일초도 쉬지않고 전화벨이 울린다. 촬영은 아예 접어두고 나라도 한 입 보태줘야할 판이다. 어떤 사람은, 활동가들이 찬찬이 설명하면 수긍하고 이내 수그러들지만, 작정하고 화풀이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도 계속 소리만 지른다. 옆 사람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밖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11시 10분, 보다못한 연합뉴스 기자 한사람이 달려와 전화 건 사람의 주소나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한다. 아무래도 무슨 불순한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는 판단. 한겨레 신문 기자도 전화 한 통을 받아 시민의 연락처를 메모한다.

모 빌라 입주자 전체가 자가용 출근을 포기했다는 제보, 볼 일이 있어 잠시 세워둔 사이에 붙이고 도망갔다는 제보, 당장 떼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으름장, 아무래도 모 후보의 농간이 아니겠냐는 격려성 전화도 있다.

스티커의 내용은 '이제는 바꿀거야, 해피데이. 총선시민연대 732-0413'이라고 적혀있다는 것.차 앞유리, 백미러, 할 것 없이 강력 접착제로 사정없이 붙여놓아 뭘로 닦아도 당췌 지워지지 않는다는 하소연도 줄을 잇는다.

"아 글쎄 저희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뻔히 욕 먹을 짓을 왜 합니까?"
"선생님,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주머니, 그건 절대 저희가 한 게 아닙니다, 지금 기자분들도 현장에 가서 취재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
"......네, 네......그럼요. 지금 전화받을 사람도 부족해서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누가 그렇게 열심히 그런 걸 붙이고 다니겠어요. 그럴 사람 있으면 저희도 좀 모셔오고 싶어요."

온갖 해명에 식은 땀을 흘리는 자원활동가들, 도대체 누구야? 아침부터 속 터지던 아줌마,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나니 분기탱천해서 그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하다.
만의 하나 그 지역 모 후보의 농간이라면 그는 이번 선거에서 국회의원 후보로서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그 본연의 임무에 대해 쓰디쓴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올 여름 장마에 천둥번개 조심하십쇼, 뉘신지 모르오나......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어버리고 종로에서 벌어질 낙선운동 집회 시간이 다가온다. 든든한 아침 덕에 라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코아 아트홀 앞으로 달려간다. 한산한 거리, 어느 빌딩에선가 현수막이 걸릴 거라는 정보가 사진 기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빌딩 옥상에서 낙선자 명단이 내려온다? 기막힌 아이디어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그 역사적 현장을 찍어보겠다고,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좋은 자리를 물색하는 사이, 그만 문제의 현수막은 냉정하게 내려와 버린다. 코아 아트홀 앞, 제일은행 건물에서 현수막이 내려오는 순간, 캠코더 아줌마, 갑자기 또 심술이 발동한다.

저거 한 시간만 걸어놔도 꽤 효과가 있을텐데, 저 암벽타는 아저씨들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한 시간만 붙어있으면 안되나? 최소한 그런 항의전화는 오늘 내로 진화될텐데, 쩝. 그러나 선관위 직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현수막은 곧 사라진다.

현수막이 걸리고 사라지는 동안, 5명의 시민과 조촐한 인터뷰에 성공했으나 오늘은 생략한다. 지금은 새벽 2시 40분.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건,그 놈의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 걱정.하나 낳아? 말아? 누가 키워? 내가? 정말 내가? 아......대책이
안서는 구만. 아무리 촬영 테잎을 되돌리고 또 되돌려도 도통 시민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캠코더 아줌마 본연의 임무인 시민 인터뷰, 내일 모조리 몰아서 다시 올리도록 허겄습니다.이 새벽, 저는 이만 마누라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보렵니다. 룰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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