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로쓰기] '빌다'와 '빌리다'의 구별

'밥 빌려 먹을 놈'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요? '밥 빌어 먹을 놈'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요?

등록 2000.04.18 10:30수정 2000.04.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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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만, 먹을 것을 구걸하여 얻어먹고 사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밥을 빌어 먹는다"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사람은 밥을 빌려 먹는다"라고 해야 할까요?

보통, '빌다'는 "소원을 빌다", "용서를 빌다" 등 '바란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빌리다'는 "돈을 빌리다"와 같이 '남에게서 무엇을 얻는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단순히 위와 같이 생각한다면, "저 사람은 밥을 빌려 먹는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빌어 먹는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예를 들어, 매우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밥 빌어 먹을 놈"이라 합니다. 역시 밥은 '빌려' 먹는 것이 아니라 '빌어' 먹는 것이군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빌어먹다'가 표제어로 나와 있습니다.
'빌어먹다'가 나오는 속담을 몇가지 소개하면,

"빌어먹는 놈이 이밥 조밥 가리랴"
- 궁한 사람은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빌어먹어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 무슨일이든(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서로의 의견이 맞아야 잘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빌다'에는 (무엇을)'바란다'는 의미와 함께 '빌리다'와 비슷한 의미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빌다'와 '빌리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도 '갚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돈을 빌어 왔다'면 '돈'을 공짜로 얻어 온 것이고, '돈을 빌려 왔다'면 갚겠다는 전제하에 얻어 온 것이라는 것이죠. 나중에 실제로 되돌려 주느냐의 문제는 나중일이고, 우선 가져오는 상황에서 돌려준다는 전제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표준어 규정을 기준으로 할 때, (무엇을) 기원하거나, 돌려줄 전제 없이 (무엇을) 얻는 경우에 '빌다'를 돌려준다는 전제하에 (무엇을) 얻는 경우에 '빌리다'를 사용하면 됩니다.

<이하에는 좀더 복잡한 내용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간단하게 두 용언의 쓰임에 대해서만 알고 싶다면, 이하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빌다'와 '빌리다'를 간단하게 구별해 보았는데, 이렇게 구별하는 것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빌리다' 풀이를 보면,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 또는 남의 말이나 글 따위를 취하여 따르다'라는 풀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문으로,

"성인의 말씀을 빌려 설교하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등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문은 모두 갚는다는 전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관용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담배 한 개피만 빌려 주세요"

라는 말도 나중에 담배를 돌려 주겠다는 전제를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애매하게 된 이유는 표준어 규정이 제정되기 이전에 '빌다'가 가지고 있던 의미와 관계 있습니다.

표준어 규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남의 물건을) 돌려 주기로 하고 쓰는 경우, (남의 도움을) 받는 경우, (남의 말이나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빌다'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빌리다'를 쓰도록 하고 있는 것이죠.

저의 경우에도 표준어 규정 이전의 사용이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성인의 말씀을 빌어 설교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고 해야 맞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담배를 빌리는 경우에는 어떤 이유로 '빌리다'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담배불을 빌리는 경우에는 빌려서 사용하고 다시 돌려주기 때문에 빌리는 것이 맞습니다.

억지로 이해하자면, 담배갑을 빌려서 한 개피를 사용하고 다시 담배갑을 돌려주기 때문에 '빌리다'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어차피 담배불을 빌리는 것도 라이터의 부싯돌과 가스를 일정 부분 사용하고 나서 돌려주는 것이니까, 담배도 한 갑의 일부분을 사용하고 나머지 담배를 돌려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약간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이해할 수가 없군요.)

결론적으로 '빌다'와 '빌리다'의 구별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빌다'의 상당부분의 의미를 '빌리다'의 의미에 포함시키면서, 이전에 구별하여 사용하던 사람에게는 혼란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표준어 규정에서는 용서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구걸하는 경우 등에 '빌다'를 사용하고, 남에게서 무엇을 얻을 때 '빌리다'를 사용하도록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식당에서 갑자기 밥이 모자라는 바람에 옆 식당에서 '밥'을 얻어 온다면, "밥을 빌려온 것"이고, (왜냐하면, 나중에 갚을 것이니까...) 거지가 배고파서 식당에서 '밥'을 얻어 온다면, "밥을 빌어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갚지 않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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