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은 이곳을 매향리라 부르지 않는다

주한미군 폭격훈련장인 매향리를 찾아

등록 2000.04.26 20:39수정 2000.04.2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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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군 폭격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매향리를 다녀와서

빼앗긴 이땅에도 봄은 오는가.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봄이면 매화 향기가 그윽하기에 이곳을 예부터 사람들은 매향리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1965년부터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폭격훈련이 진행되어 화약연기가 매화 향기 그윽하던 매향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 주한미군은 이곳을 매향리라 부르지 않는다.

'쿤니 사격장'.
미국사람들에게 이곳은 매향리가 아니라 미국 땅의 일부분이다. 주한미군의 폭격훈련은 이곳 주민들의 삶과 희망마저 유린하고 있다. 수십년간 이곳 주민들을 소음과 폭격으로 인해 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이제 하나둘씩 이곳을 떠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암에서 버스를 타고 매향리에 출발하기 전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한 아저씨가 다가와 나와 내 후배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다짜고짜 화를 버럭내며 이런 얘기를 했다.

"자네들 매향리에는 왜 가려고 하나? 시끄러운 포탄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듯한 그 곳에 가서 무슨 사진을 찍는다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게나"

그는 얼마전 자기가 태어나 몇십년간을 살아왔던 매향리를 떠나 이곳으로 나왔다고 한다.


잠시 후 버스를 타고 매향리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난 번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매향리는 고요했다.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예전에는 마을 어귀부터 찢어질 듯한 폭격소리와 비행기들로 인해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곳을 들어오지 못했는데 말이다.

철조망과 경고문 그리고 "사격장을 철거하라"는 구호로 느낄 수 있는 이곳의 상황과 달리 주변에 폭격훈련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은 무색할 정도였다.


매향리 미공군 폭격연습 주민피해 대책위원회 위원장 전만규 씨는
"다른 날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시끄러웠어. 그런데 요즘 들어서 방송국이나 AP통신 같은 언론에 이곳의 상황이 계속 알려지니까 외부에서 사람들이 오면 이곳 상황을 숨기려고 폭격훈련을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

며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에는 그 횟수가 너무 많고 시간이 정확한걸 보면 아무래도 도청을 당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때마침 탱크킬러가 굉음을 내며 날아간다.

"저 비행기는 A-10기야. 평소에는 전신주에 닿을 만큼 낮게 날아서 전투기 조종사의 헬멧이 보일 정도야. 저거 보라고 우리들이 쳐다보니까 하늘 높이 올라가는거" 속상한 마음에 전씨는 지나가는 전투기를 바라보며 들리지도 않을 욕을 내뱉어 본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저 망할놈의 비행기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곁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도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야 돼. 주민들이 모두 화나서 싸우는 사람들 같다니까..." 말하며 소음 때문에 한참 밝고 명랑해야 할 자식놈들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아 늦어도 다음달에는 이사를 가려고 생각중에 있다고 한다.

한참 공도 차고 뛰어다니며 희망을 키워가야 할 아이들이 제나라 군인도 아닌 미군의 폭격훈련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제 땅을 하나둘씩 떠나가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실제로 매향리는 조사결과 소음 정도의 평균이 85-88 데시벨이며 훈련이 10편대 이상 이루어질 때는 최고 110-113 데시벨로 환경정책기본법이 제시하고 있는 일반 주거 지역의 기준치인 50데시벨을 훨씬 웃돌고 있어 이곳 주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해가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향리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훈련으로 생명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삭이 된 임산부가 포탄에 정통으로 명중을 당하여 즉사 당하는가 하면 포탄에 16세된 소년의 머리가 날아가 버리고 한자리에서 놀던 4명의 소년들이 폭사당하고, 고기를 잡던 어부가 미군의 헬리곱터에서 발사한 총탄에 팔뚝을 관통당하는 등의 사상자가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 이상 주한 미군의 피해를 당하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매향리 주민 5백여명은 서울로 상경해 3월 27일(월) 국방부 앞에서 '주한 미군의 폭격연습 중단촉구와 미국과 정부 차원의 사과와 대책 마련을 위한 매향리 주민 결의대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방부는 "한미행정협정(SOFA)상 어쩔 수 없다. 기다려라"는 말만 할 뿐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주한미군이 철수하지 않는한, 한반도의 분단이 끝나지 않는한 매향리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 전만규 씨의 안내를 받아 평일에는 주한미군의 폭격훈련으로 들어갈 수 없는 바닷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닷가는 그야말로 포탄 무덤이었다. 폭격훈련으로 생긴 수많은 탄피와 포탄들.

이중에는 불발탄도 있어 잘못 건드리다가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바다 저멀리에는 폭격연습으로 인해 농섬이 되어버린 섬이 보였다. 반세기 넘는 주한미군의 폭격으로 섬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전만규 씨는 "매향리 주민들은 선조대대로 가꾸고 일구어 내려왔던 토지와 황금어장을 빼앗기고, 지금은 미군의 철저한 통제와 사전허가 절차에 의하여 국방부에 매년 임대료를 지불하는 소작농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며 덧붙여 89년 당시 매향리의 주민들의 고통과 생존권 침해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책임과 대책을 단호히 추궁하던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현실은 하나도 바뀐 것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연거푸 담배를 태워본다. 그러나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미국놈들과 끝까지 싸울거야. 내가 매향리에 숨쉬고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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