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밥비벼 먹던 날

주먹밥처럼 하나가 되어야 할 아이들을 위해

등록 2000.05.03 11:39수정 2000.05.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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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떠나는 님에게 새벽에 일어나 주먹밥 몇 개 쥐어주며 눈도장을 찍는 아낙들이 있었다지요.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을 때 소금만 뿌려만든 밥. 그 밥을 학생들과 만들어 먹기로 한 날이 되었다.

모둠(분반으로 나누는 것)을 만들어놔도 서로의 생각을 낮추며 함께 섞여 하나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별로인지라, 함께 '밥비벼먹기'를 제의해봤다.

한창인 때 도시락 하나는 부족하여 거의 매시간 매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겐 선도부의 단속은 코방귀나 다름없다.

"정말 밥을 비벼먹어요? 그것두 수업시간이에요?"
"응..그렇다니까"
"와아~ 재밌겠다. 그럼 책 준비해가지 않아도 되지요?"

"(끄덕끄덕거리며) 그럼..모둠별로 간단하게 준비해. 각자의 도시락에 참기름 적당하게 가져오고, 묵은 김치, 무엇보다도 양픈이 필요해. 거기에 모두의 도시락을 넣어서 비빌거니깐. 그럼 고추장도 당연히 필요할테지. 아무튼 각 모둠이 개성있게 준비해봐~"

볕 좋은 토요일 늦봄 오후만 기다리며, 정말 비벼먹기를 하느냐고, 다른 반 아이들은 달려와 왜 우리반은 안하냐고 묻고 야단이었다.


모두 여섯 모둠.
참 이상한 건 시로 만드는 신문을 제작할 때도 활동이 미흡하던 모둠이 이날도 숟가락 외엔 아무 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채 가사실에 나타났다.

의아했지만 먹을 것 앞에선 그럴 수 없었으므로, 사전준비를 위한 만남이 없었냐고 하니깐 비글거리며 웃기만 한다. 다른 모둠 아이들은 준비해온 양픈에 도시락을 퍼붓고 있었다. 시작하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할 수 없이 두 개의 양푼을 가지고 온 모둠에게서 빌려다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모둠에 주었다. 여기저기 모둠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주눅 들어있던 아이들은 금새 여기저기 모둠을 돌아다니며 미처 비비지도 않은 밥을 떠먹고 야단이다. 먹는 것은 누구에게나 웃음을 주나.

다 되었으면 모두 감사의 말을 해보자고 했더니, 빨랑 먹을 욕심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맛난 음식을 주셔서."한다. 그 틈에도 몇 숟갈 떠먹는 아이들이 밉지가 않다.

앞 모둠에 있는 애란이가 비닐을 손에 끼고 잘도 비벼대길래 아이들의솜씨를 보여주기 위해 작은 그릇에 주먹밥 여섯 개를 만들어 놓았다.

어느 모둠인지 알아야 한다며 제각기 준비한 후식의 일부로 장식을 하고 "모두 맛나게 먹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푼은 딸가닥거린다. 숟가락도 없이 아이들 속을 비집고 다니며 한 술씩 뜨니 배가 불러왔다.

그런데 소민(가명)이가 작은 밥그릇에 밥을 가득 채워놓은 채 다시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나중에 친구들이랑 먹을거라고 한다. 옆에 가은(가명)이는 숟가락도 뭣도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멋쩍은 얼굴의 소민이는 얼굴이 붉어지고 드디어 한 마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저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밥을 섞어 만듦으로써 서로를 섞어 다른 하나의 몸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로 한다고 알 수 있을까.

먹는 것에서도 하나되지 못한 채 나와 친한 친구만 챙기려드는 아이들 앞에서 씁쓸한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다.

핵가족화로 혼자 아니면 둘 정도의 아이어서일까. 모두가 다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협동심이 뭔지 느낄 수 있으며 공동체의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결국 가은이는 그 뒤로 몇 시간째 조용히 말이 없었는데, 수학여행 가는 날에 비로소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사실 내게 죄송하기보단 아이들에게 미안했을 텐데 말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그래서 얼마나 소중히 가꿔나가야 하는 지 알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현관 오른편 기둥에 오늘도 제비는 그 조그만 입으로 집을 짓고 있다. 미처 마르지 않은 흙집. 째짹째짹 열심히 (울퉁불퉁해도) 나르고 있다. 하늘이 모처럼 새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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