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으며 '형님 괴로워 죽겠습니다'라고 자주 말했다"

오마이뉴스 공개추적: 두 서울대생 실종 10여년, 노진수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⑥

등록 2000.05.18 10:00수정 2007.02.2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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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노진수씨(62년생, 서울대 법대 81학번, 82년 4월 실종)의 고교친구 김용범, 송경호씨, 대학동기 김강연, 한문철, 강동근, 박성호씨를 만났다. 하지만 고교친구는 실종과 관련한 직접적인 정황을 모르고 있었고, 대학동기들이 전하는 노씨의 모습은 제 각각이었다. 처음 대학에 와서 일학년 초반에 잠깐 어울렸기에 노씨에 대한 기억은 개인적이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종 최근까지 함께 자취생활을 했고 비교적 노씨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박성호(42세, 서울대 법대 81학번)씨의 진술은 일관성이 있었다. 특히나 당시 노씨가 말못할 고민이 있었다는 부분과 학생운동 활동 수준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다.

박성호씨는 81년 11월 겨울 초엽 학교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즈음 그는 운동과 관련해 어떤 진로를 선택할 것인가로 고심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정문 쪽으로 내려오는 노진수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씨는 박씨에게 술을 한잔하자고 권했다. 박씨는 술을 별로 먹고싶지 않았다. 다음에 하자고 거절하자 노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는 술인데 거절할 겁니까.....?"

순간, 박씨는 섬뜩했다. 결국 함께 술을 마셨고 그 모습이 정말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형, 형"하고 따랐던 노씨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올라와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이 그의 행방이었다. 마지막 술자리에서 노씨의 고민이 뭔지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가슴에 멍에로 남아있는 듯했다.


박성호씨는 전형적인 386 운동권이다. 재학중일때는 써클도 여러개 만들었고 조직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85년, 경남 창원 노동현장으로 갔고 93년 복학하여 남은 학기를 마칠 수 있었다. 노진수씨와는 81년 9∼10월 두 달간 함께 자취생활을 하였다.

- 노진수씨는 언제 만났고, 주로 무슨 일로 만났나.


"81년 입학해서 처음으로 학년 엠티를 갔다. 거기서 학년 대표 선출이 있었는데 진수가 자신을 뽑아달라 부탁하러 찾아왔다. 특별한 일로 만난 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 옆에서 지켜본 노진수는 어떤 인물인가.

"말수가 적고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고 좀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착하고 의협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의협심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사회문제나 정치문제까지 넓혀 볼 수 있는지.

"아니다. 정권에 대해 못 참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친구가 못된 짓을 했으면 '그런 행동은 옳지 못하다'라고 바로 말하는 정도였다."

- 노진수씨와 얼마나 같이 자취했나.

"81년 9, 10월 두 달간 자취했다. 원래는 나와 선배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진수가 마땅히 있을 데가 없다며 찾아왔다. 그래서 함께 살게 됐다."

- 자취할 때 어떻게 지냈는지.

"진수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바빴고, 진수도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었다. 잠잘 때가 돼서야 얼굴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진수가 어디를 다녔는지 아는바가 없다. 진수에 대해 가장 기억나는 부분이 술이다. 진수는 술을 많이 마셨다. 한번은 너무 술을 먹는 걸보고 '이렇게 살면 다신 너를 보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인가.

"81년 11월경 학교로 올라가다가 반대로 내려오고 있는 진수를 만났다. 진수는 나를 보자 술한잔 하자고 권했다. 앞으로의 진로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여서 술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다. 진수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는 술인데 거절할거냐'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섬뜻했고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가 진수를 본 마지막이었다. 진수는 괴로워하는 눈치였으나 그 이유에 대해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 같이 생활하면서 어떤 고민이 있어 보였는가.

"진수는 마음에 있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잘 안 했다. 하지만 그가 고민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술을 먹으면서 '형님 괴로워 죽겠습니다'란 말을 자주 했다. 술 먹는 걸 두고 나무라면 '형님이 뭐를 안다고 그러십니까?'라며 반문했던 게 기억난다."

- 노진수씨는 학생운동을 했었는가.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들어갔으면 78학번이다. 나이도 좀 된 편이고 언더써클을 만들고 또 참가하면서 당시 운동했던 사람은 거의 다 안다. 하지만 노진수가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은 들은바 없다. 내가 알기론 그는 운동에 문외한이었다. 내가 사회 비판적인 얘기를 하면 오히려 그런 얘기를 피했다. 작년에 진호씨(노진수의 친형)가 상경해 진수를 찾으면서 정치적인 실종으로 단정하는 걸 두고 '저건 아니다'고 생각했다. 실종 마지막 독서실 총무의 발언 내용을 접하고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운동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일을 당했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 혹시 당신이 모르는 운동을 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예를 든다면 백태웅씨처럼 활동을 했다거나 아니면 학교가 아닌 노동현장으로 다녔거나….

"태웅이가 비공개적인 조직에 있었지만 모두가 모르지는 않았다. 운동을 좀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현장 가능성은 없다. 당시 그 내용은 내가 고민했던 것이다. 학교에 남을 것이냐, 아니면 현장으로 가느냐… 이런 얘기를 진수에게도 했던 것 같은데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진수가 여기에 동조를 했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진수는 학생운동을 한 적이 없다."

- 노진수씨 실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수는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극과 극이었다. 어쩔 때는 말도 많이 하고 쾌활했지만 어느 땐 아주 침울했다. 고민이 쌓이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혹시 자살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가능성 전에 최종 목격자였던 이승진씨를 찾아봐야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주민등록번호 62*****-, 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주민등록번호 63*****-*******, 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주민등록번호 62*****-, 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주민등록번호 63*****-*******, 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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