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밭마을 주민, 산내에서 무더기 학살

" 처형된 날 7월 4-5일이다 "

등록 2000.05.22 23:51수정 2000.05.2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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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초 집단연행, 7월초 집단학살-유족들 산내에서 사체 확인작업 했었다.
-대전교도소 산내 학살 증언자를 찾아서 1

올해로 6.25가 난지 꼭 반세기가 흘렀다. 반세기가 흘렀건만 동족 상잔의 비극이 남긴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고 있다. 50년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온 사람들. 아버지의 제삿날도, 형제들의 무덤도 알지 못한 채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렇게 묻혀버린. 그래서 쉬쉬하며 가슴속에 묻어둔 기억을 찾아 산내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을 찾아 나섰다.

그 첫 번째로 대전근교에서 약 10여명의 희생자가 있다는 유족의 1차 증언에 따라 대청댐이 인접한 갈전리(당시 충남 대덕군 북면 갈전리, 현 대전 대덕구 갈전동)를 찾았다. 대전교도소 산내 학살사건과 관련해 4.3 항쟁과 여순사건 관련자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접수된 사례로 가장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던 그해 봄. 갈전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을 주민 10여명이 죽어나던 그해, 끌려갔던 사람들은 모두 산내(대전교도소 산내 학살사건 학살장소, 현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죽었다고 한다.

갈전리를 취재하기에 앞서 지난 5월 8일 당시 형(성도경, 당시 26세 정도)과 4촌을 잃은 성보경(63세, 부동산업)씨를 만나 보았다. 당시 13살이었던 그는 당시 정황을 묻는 질문에 "죽일 필요가 없었는데 죽였단 말여"라며 울분부터 터뜨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보경씨는 그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워낙에 어린 나이에 경험한 일이라 5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상황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소문을 통해 들은 형님의 기일(음력 5월 20일)과 당시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주도했던 사람이 김기택씨라는 것 정도였다.

"5월 20일 그날 죽었다는 풍문만 들은 거지. 아버지 외사촌 동생이 그 당시 경찰이었다. 그 분 말이 밤중에 뚜껑도 없는 차에다 개돼지 싣고 가듯 싣고 갔다. 자기가 호휘 했는데 가다가 중도에 내려 학살지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던 말을 들었다."


인터뷰 말미에 성보경씨는 형님을 직접 면회까지 했었다고 밝혔다. 당시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와 함께 대전교도소로 면회를 갔었다고 한다. 그가 형님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 날, 그는 유일하게 형님과 얘기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형님 무슨 죄를 졌어요 하고 내가 물어 보니까 형님이 그래요 나 죄 없다 하는 소리를 들어본 것 같아요. 그러면 나와야죠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성보경씨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6.25직전 갈전리와 부근 마을에서 당국의 대대적인 좌익사범 색출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전교도소로 이송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력 5월 20일 경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성보경씨의 이런 증언은 당시 갈전리 주민 10여명의 죽음이 당국에 의한 집단적인 연행과 6.25발발 직후 벌어진 산내 학살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대전교도소 산내 정치범 학살의 시기와 정황으로 볼 때 성보경씨가 알고 있는 형님(성도경씨)의 기일인 5월 20일은 양력 7월 5일로 학살 기간이 당초 7월 8-10일 사이의 3일간이 아니라 10일 정도에 걸쳐 진행됐다는 다른 증언자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해 당시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신탄에 무수 씨레기 사러갔더니 서울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갈밭(갈전리)에서 왔다고 하니까 갈밭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느냐, 왜 갈밭사람이 없느냐고 그랬더니 소문 듣기로는 거기 쑥대밭이 됐다고 하던데 어떻게 사람이 남아있느냐고 그래서 그렇진 않다고 그 사람(좌익활동 한 사람)들 다 처치하니까 우리 안전하게 산다고 그랬지"

시집와서 지금껏 갈전리에서 살고 있다고 밝힌 이용우씨(77세, 여)의 이 짤막한 증언은 6.25 당시 갈전리의 상황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갈전리 초입에서 밭을 일구던 오순예(77세)씨의 증언 역시 당시의 처참했던 마을의 기억에 "아이구 말해 뭐혀"라며 긴 한숨부터 토해 냈다.

오순예씨는 당시 대규모의 군인(경찰이었던 것으로 확인됨)들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갔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 어귀에서부터 시집가는 새색시의 가마를 수색하고 집집마다 다락과 집안 구석구석을 수색해 좌익 활동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끌고 갔다. 이 와중에 4형제, 5형제가 모두 끌려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집도 있었다. 그때가 50년 봄, 학살 시기는 여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오순예 할머니는 당시의 처참했던 마을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한집에서 행상 둘이 나가는데 기가맥히데유"

오순예씨의 증언을 듣고 난 후 기자는 당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냈던 김씨와 성씨들이 살던 곳을 둘러보았다. 50년, 반세기가 흐른 지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당시 상황을 말해주 듯 그 자리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터라고 보여지는 허물어 져버린 담장과 아랫마을(김씨, 성씨가 살던 곳)과 윗마을(변씨촌)을 이어주던 조그마한 다리만이 남아 있었다. 80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지구가 된 갈전리는 현재 당시 피해 가족들은 모두 마을을 떠난 채 변씨들만 마을을 키고 있었다.

수몰된 갈전리의 옛 집터를 돌아보고 있던 기자 일행은 운 좋게도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이용우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용우씨는 그 동안 갈전리의 집단 연행과, 산내에서의 학살을 증언해온 다른 증언자의 경우와는 달리 경찰의 갈전리 집단 연행의 이유와 시기, 학살 후 유족들의 사체확인 작업까지 있었다는 보다 구체적인 증언을 함으로써 산내 학살과 갈전리의 관계를 푸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했다. 또한 이전의 증언자들의 증언 내용과 일치해 증언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용우씨의 증언을 통해 확인 된 당시 갈전리의 대대적인 좌익사범 색출의 직접적인 계기는 좌익 활동가들의 신탄진 지서습격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시작된 대대적인 좌익 색출작전은 며칠동안 이루어 졌고 10여명의 마을 주민이 산내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은 경찰의 매질과 이후 부역 등을 통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렇다면 마을 주민이 집단적으로 끌려간 시점은 언제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이용우씨는 6월 초로 기억하고 있었다.(구체적인 날짜를 알아보기 위해 신탄진 지서 습격사건 날짜를 충남지방 경찰청에 확인 중)

"전쟁 터지기 전이여. 6월 초, 6월이지. 늦모 낼 때, 올모 심어서 메고 늦모 심고, 그렇게 할 때지"

이용우씨는 당시 마을 주민이 산내에서 학살당했다는 증거로 당시 유족들이 산내에서 사체를 확인했었다는 증언을 이어갔다.

"산내에서 다 죽었댜. 대전교도소에다 너놨다가 한꺼번에 처치했댜. 찾아가라고 연락이 와서 시체 찾으러 갔었지. 고상수 아버지가 준혁이 형 데리고 갔는디 다 부패 되가지고 산 고랑에다 죽은 대로 집어넣어 가지고 알아 볼 수가 없더랴"

이러한 증언은 앞서 증언자인 성보경씨의 증언대로 당시 갈전리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산내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당시 당국에 의해 산내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해 사체를 확인하라는 통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취재팀은 이번 갈전리 피해 유족과 마을 주민의 증언을 통해 그 동안 논란이 돼왔던 산내학살의 기간이 정설로 되어 왔던 미군의 학살기간(7월 초, 3일)과 당시 형무소 경비대의 주장(7월 8-10)과는 달리 증언자들의 주장인 7월 1일부터 약 10간의 학살이 실제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피해 유족인 김종현씨와 성보경씨는 각각 아버님과 형님의 제사를 음력 5월 19, 20일 즉 양력 7월 4, 5일로 지내고 있다.)

또한 증언자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갈전리 사람들은 4.3이나 여순 사건 관련자와는 달리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미결 상태에서 처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갈전리 주민이 끌려간 시점이 6월 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한달 만에 그들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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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 민언련 매체감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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