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가 없는 드라마는 죄악이다. 드라마는 다분히 오락적 요소가 지배적인 문화적 미디어이고, 따라서 재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게 교훈적 요소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될 수 없다.
작가나 연출자들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재료들을 동원하는데, 이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섹스"와 "폭력", "불륜"이다. 물론 이러한 재료들이 시청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드라마를 재미있게 하기 위한 이런 재료들이 무조건 수용자들에게 악영향이 미친다고 속단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일은 아니다.
"섹스"를 보는 사람들이 문란해진다. 내지는 "폭력"을 보는 사람들이 폭력적이 된다라는 논리는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구도보다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조작된 여러 가지 재료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잠재의식 속에 왜곡된 인식을 심어놓는 경우가 있는지 심각히 검토해 봐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수용자 스스로가 느끼지 못한 채, 점점 더 수용자들의 인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며, 비평가들이 공격해야할 주 타겟이라 하겠다.
항간에 졸작 중에 졸작이라고 꼽히는 MBC미니시리즈 "이브의 모든것"은 뻔한 스토리, 극단적인 선악대비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벌써부터 비난받고 있지만, 더욱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수용자들의 인식을 지배하는 아주 위험한 요소들이 풍부히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장자 선호적 인식
창업자의 동생과 아들의 경영권 대립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로빈훗에서 비롯된 이러한 대립 구도는 여러 기업드라마에서 눈에 뜨이며 언제나 아들의 정당한 승리로 마무리지어지게 된다. 이는 경영능력보다는 창업자와의 적통여부를 더 중요시하는 재벌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이른바' 근본 없는 사람들에게 크레딧을 주지 않는 사회 풍토의 정당화
아이들은 (특히 여자들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라나야 한다는 잘못된 사회풍토를 정당화하여 새로운 계급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역시 위험한 재료이다. 특히 허영미가 악녀가 된 인과관계에 "허영미가 고아"라는 점을 동원한 것은 세상의 수많은 고아들을 모독하는 처사가 될 수 있다.
여자의 과거를 노력형 여자의 몰락의 근거로 삼는 드라마 전개
극중 허영미는 고아로서, 생계형 직업여성의 전력을 지니고 있으나, 개과천선하여, 화류계와 인연을 끊고 노력을 거듭하여, 방송사 아나운서로 활약하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기 보다는 과거전력을 문제삼아 그녀의 몰락으로 연결시키려는 발상은 자칫, 한번 직업여성은 주제에 맞게 계속 직업여성으로 눌러앉는 것이 분수에 맞는 일이라는 인식을 수용자들에게 심어 줄 수 있으며, 이는 기득권 여성들의 무기 또는 추잡한 남성들의 무기로 현실에서 작용할 수 있다. 오히려 "화류계에서 뉴스데스크까지"라는 다큐멘타리성 기사를 통해 허영미를 띄워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아니한가.
자수성가형 창업자보다는 왕자를 동경케 하는 인식 조장
극중 윤영철 이사는 뭇여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이른바 "왕자"다. 좋은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라나, 좋은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문화혜택을 두루 받고,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인 이른바 분위기와 능력을 갖춘 왕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자의 자리는 그가 스스로 노력에 의해 쟁취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게 저절로 주어진 것에 불과한 것임을 수용자는 간과할 수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왕위를 쟁취하는 자수성가형 창업자를 동경하기 보다는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왕자를 동경케 하는 이른바 신데렐라류의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적 존재임을 은연중에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음
이건 굳이 이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더 이상 논하지는 않기로 한다.
유치하게 이름에 반영된 성격 "허영미" "진선미"
허영미가 왕자를 사랑하면 "허영"이고, 진선미가 왕자를 사랑하면 그건 "진실"이라는 뜻? 아니면 허영미는 허영으로 인한 아름다움을 지녔고, 진선미는 진실된 선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뜻? 아무튼 극단적으로 유치하게 지어진 이름 또한 이 드라마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어머니의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마보이"형 인간형 양산
극중 우진의 어머니인 송정숙(박원숙 분)은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의 전형이다. 허영미가 따뜻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직감적으로, 허영미가 아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허영미를 탄압한다.
그후,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아들과 허영미의 교제를 인정하나, 이 드라마는 결국 송정숙의 처음의 태도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당시 허영미를 향한 송정숙의 태도는 분명 이성적이지 못한 태도이며, 정당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그러한 송정숙의 태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정당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거봐라~ 엄마말 안들으니까 그렇게 되지?"라고 비웃는 듯한 이 드라마의 전개는 아들의 독립적인 자아 형성을 방해할 수도 있는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무조건 옳은 것으로 인식시켜, 자칫 "마마보이형" 인간을 양산해 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드라마는 수용자들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재미를 선사하는 기술을 지니어 있어야 한다. "섹스", "불륜", "폭력" 등에 대하여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필자의 주장은, "수용자들의 수준에 맞게"라는 조건을 반드시 수반한다.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수용자들의 인식을 지배하는 위험한 요소들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수용자들이 스스로 저 드라마에서 무엇이 위험한 요소인지 깨달으며 드라마를 재미있게 즐길 수만 있다면, 그 드라마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들의 수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시청률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이브의 모든것" 제작진들은 이제는 재미를 주면서도 일정한 게임의 룰을 어기지 않는, 정정당당한 드라마 제작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이브의 모든것"에서 보여주는 "권선징악"은 착하면 상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는다는 고전적 교훈을 주기보다는 계급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만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이진석 PD는 정말 모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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