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시인 안도현과의 만남

'연어'의 작가 안도현과 함께 하는 문학기행

등록 2000.06.20 16:09수정 2000.06.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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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 안도현이 해직교사 시절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곱씹으며 탄생시킨 시 '너에게 묻는다'.

시인 안도현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야말로 '헌신의 기쁨'을 느끼며 살았노라고 했다. 자기 몸을 불사르며 방도 데워주고 라면도 끊여주며 마지막 재가 되어 빙판길 미끄럼을 방지해 주는, 그래서 생의 마지막까지 사명을 다 하는 연탄재가 되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상전벽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모내기가 끝난 김제평야의 푸르름을 폐포속 깊숙히 호흡하며 안도현 시인과 함께 떠난 문학기행은 전주를 출발하여 군산 임피에 소재한 채만식의 생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 문학기행은 채만식 선생 소천 50주년을 맞아 한국방송대학 전북지역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이 준비한 행사였으며 재학생인 양영모(오마이뉴스 기자회원) 씨의 소개로 4명의 오마이뉴스 전북기자단이 함께 했다. 이 취재기는 안도현 시인과의 대화를 위주로 쓰여졌다.

제1신 : 탁류의 작가 채만식 생가

군산시 임피면에 위치한 채만식 생가는 몇 년 전까지도 생가를 지키던 노인이 사망함에 따라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옆으로 바다를 끼고 산에 둘러싸여 있는 이 마을에는 세월에 묻혀 곰삭아야만 제 맛이 난다는 젓갈을 담은 빨간색 플라스틱 통들만이 열을 맞추어 서 있을뿐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암울한 사회상을 냉소와 욕설로 묘사해 우리나라 풍자문학의 대명사로 꼽히던 채만식의 체취는 세월에 퇴색돼 버린 듯 느낄 수 없었고 한없이 고즈넉하기만 했다.

생가 옆에 새로 세운 듯한 커다란 송전탑이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어 버려진 선생의 집을 더욱 초래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마당에는 이름없는 잡초들만이 그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왜 관심을 가지고 보전할 수 없었느냐고 행정당국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인이 된 선생의 생가를 본 예비 문학도들은 자신들의 무관심만을 탓하는 듯했다.

생가의 뒤편에는 선생의 묘가 있었고 묘비 뒤에 자손들의 이름 부분에 일부러 훼손시킨 흔적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안도현 시인은 채만식 선생의 전처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 그랬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제2신 : 금강하구둑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벌판을 휘둘러 흐르고 마침내 서해의 바다로 말없이 흐르는 금강, 그리고 그 하구에는 바닷물의 역류를 막는 '금강하구둑'이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남대천 '연어'가 있다면 금강하구에는 '숭어'가 있었다.

하구를 막은 둑은 수로를 막고 있어 알을 낳기 위해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숭어떼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어로를 따라 강으로 오르던 숭어떼들은 커다란 철재 관문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점심을 마치고 탁류의 현장 군산 시내를 향해 달렸다. 탁류의 배경이 되었던 째보선착장과 구조선은행 앞, 미두장터, 국도극장, 콩나물 고개, 싸전, 약국, 병원, 정주사의 집터 등을 둘러 보았다.

제3신 : 난이와 나는 언덕에 앉아서 바다를 보는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문학기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월명공원에 있는 채만식 문학비였다. 1984년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세운 문학비가 월명공원의 정상에 세워져 있다. 문학비를 둘러보고 일행은 군산내항과 장항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임시 교실에서 시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였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학생들과의 대화 내용이다. 시인 안도현은 신석정 시인의 "작은 짐승"이란 시를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해 나갔다.

- 전업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동기는?
"'글을 쓰는 것은 굶는 길로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인이 되었다. 먼저 모든 문학하는 분들 중에 타고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이 많았었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에는 교지가 있었다. 문예반은 글을 쓰고 미술반은 그 글에 삽화를 넣는 그려 넣었다.

한번은 교지담당 국어선생님께 아침에 불려가 뺨을 얻어 맞았다. 이유는 교지에 들어갈 삽화를 늦게 그려 온다는 이유였다. 화가 났고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국어선생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 단지 교지에 싣기 위해서 말이다.

글을 쓸 때 첫 단계는 모방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200여 편의 시를 읽었다. 심지어 '선데이 서울'에 나오는 시까지 읽었다. 가장 쉬운 '가을'을 주제로 썼다. 그리고 채택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독후감 한편을 더 썼다. 흔히 독후감은 책을 읽게 된 동기 두 줄, 보고 베끼는 줄거리 삼십여줄, 마지막 소감 두 줄이 고작이다. 나도 여느 학생들처럼 '매우 재미 있었다'내지 '매우 인상 깊었다'를 소감으로 쓰고 즐거리는 거의 책을 베껴서 냈다.

그런데 시는 채택이 안되고 독후감이 실렸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가면 문예반에 들어가서 꼭 시 한편을 교지에 실어 보겠노라고 결심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시를 쓰게 되었다."

- 글쓰기 작업은 어떻게 하는가?
"글을 쓰려면 옛 분들은 다독, 다작, 다삭량을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전업작가로서 매일 글만 쓰는 것이 아니다. 거의 글을 읽는데 신간을 소비한다. 전업작가는 글을 써서 먹고 산다기보다 글을 읽어서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시 한편을 쓰기 위해서 적어도 200 ~300편의 시를 읽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약 300편의 시를 썻으니까 적어도 6만편 정도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타고난 작가가 되지 못해서 많이 고친다. 내 시가 쉬운 편인데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쓸 거라 생각들 하지만 옛날에는 최소 갱지 50~60장을 없애야 시가 하나 나왔다. 바느질을 많이 한다. 그 대신 바느질 자국을 보이지 않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 글은 손끝으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써라(?)
"'손끝'은 기술을 말하고 '가슴'은 삶의 치열함과 진정성이다. 그러나 약간의 함정이 들어 있다. '가슴으로' 이것은 문학적 허영이다. 연애도 가슴으로만 하면 나중에는 재만 남는다. 흔히들 결혼을 하려면 상대의 집안,능력 등을 따지지 않는가? 그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과 다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문학이 뭐가 중요한가!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다보면 문학은 되는 거다".

그러나 지금 생각은 다르다. 가슴으로만 쓰고, 문학인으로 삶을 중요시 했던 문인들이 장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글이란 가슴뿐만 아니라 손끝으로도 써야 된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좋은 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 글을 쓴다는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는가?
"없다. 배고플 때 혹은 괴로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사실 해직교사 시절에도 나는 대접받았다. 그 당시는 해직교사들에게 투쟁 이미지가 강해서 다들 무서워 하는 시절이 아니었는가? 단지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해서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해직교사가 되니 친구들과 술마실때 술값 내라는 사람 없어서 좋았다.

지금은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생활하고 있다.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 쓰기와 내 자신과의 정면승부. 직장이라는 것이 나태하고 삶을 안정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이가 먹고 하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 삶의 진정성과 시를 쓰는 이유는?
"똑같은 일을 똑같은 말로 하는 것은 재미없다. 쉽게 쓰려 했다. 문학 한다는 것은 안보이는 것을 보게 만드는 작업이다. 우리에게 안보이는 것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 자기 식으로 봐서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한 소재를 택하는 것은 아니고 다르게 보자는 것이다. 흔한 말로 세상에 의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찮고 작은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캐내는 사람이 시인이라 생각한다.

- 물푸레나무의 진실은?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 연어가 회귀하는 곳이다. 글을 쓰다보면 나무나 물고기의 이름이 꼭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전주-군산의 벚나무만 쓸 수는 없지 않나? 물푸레나무라는 어휘가 주는 어감이 참 이뻐서 썼다. 시집 '연어'는 남대천 상류에? 연어가 나무를 타고 철버덩거리며 거슬러 올라가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 물푸레나무는 깊은 산속에 산다. 물푸레의 어감이 연어가 물을 거슬러 오르는 소리 등과 어
울림이 좋아서 사용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전취재가 중요한 것 같은데
"연어는 모천으로 돌아가서 알을 낳고 죽는다. 글쓰는 사람들은 연어의 생태 자체가 감동적이고 문학적이라 생각한다. 연어의 일대기를 담은 일본의 수중촬영 비디오등 물고기가 나오는 비디오와 영화는 거의 봤다.

신작 '짜장면'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중국집 오토바이 배달원인 '짜장면'을 쓰기 위해 처음에는 중국집 배달원을 지인을 통해 소개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관찰을 위해 중국집에 자주 갔다. 음식을 시키고 유심히 관찰했다. 중국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등을 보고 들었다. '짜장면'의 배경이 되는 미장원도 마찬가지다. 미장원에도 많이 갔다."

- 신간 '짜장면'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주인공이 17살의 가출소년이다. 내가 옛날에 가르쳤던 고등학교 이이들이다. 정말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흔히들 말하는 문제아들이다. 그런 신세대들은 경박하고 가볍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겪었던 그 시절보다 진지하고 고민들이 많다. 단지 해결 방법이 빗나갔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왜 하필 비표준어인 '짜장면'을 제목으로 했나?
"표준어가 '자장면'인데 우리나라 그 어떤 중국집에 가도 '자장면'이라고 쓰는 곳은 없었다. 그것은 학교나 어른들이 가르쳐 준 사전적 언어이다. 아무 데도 쓰지 않는 자장면이 죽은 말이라면 짜장면은 살아있는 말이다.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말, 진실에 가까운 말이 '짜장면'이다."

시인 안도현과 함께 한 문학기행은 탁류가 흐르는 금강하구와 군산시내를 아우르는 한 폭의 맑고 깨끗한 수채화였다. 이번 문학기행은 소탈하고 차분해 보이는 안도현 시인과 함께 했던 전라도의 '단백한 음식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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