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털처럼 가벼운 애국가 들어 볼래요?

아이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이유

등록 2000.06.24 23:42수정 2000.06.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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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지의 내용을 보면, 일본에서는 히노마루 게양식과 기미가요 제창을 교내에서 의식 때마다 하도록 학교장과 교사에게 교육청에서 서서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부활과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관 조장이라는 의도를 우려한 일본 청년들과 교사들은 졸업식 때 이를 거부하여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모 서울대 교수는 이것이 민족주의로 잘 포장된 우리의 국가주의에 주는 교훈은 없을까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바라보는 나는 그 교수님에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걱정마시라고... 우리 아이들의 국가주의는 때와 장소를 가려서 나타날 뿐 아니라, 국가를 부르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국가주의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단지 귀찮음 때문이라고 한다면 다소 위안이 되실는지.

조회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지 않은 지가 몇 년 되었다. 새로 전근 온 선생님은 이 학교 아이들은 립씽크도 안한다며 기막혀 한다. 몇 년 사이에 아이들 목소리는 더 듣기 힘들어졌고, 가사가 딸린 애국가와 교가의 음악 소리는 더 커졌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데 일조한 것 중의 하나가 반주곡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가사가 딸린 큰 소리의 음악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파묻히기 좋아서 굳이 올라가지도 않는 고음을 흉칙하게 내면서까지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에게 애국가나 교가제창에 관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46명 중 20명 이상이 전혀 부르지 않는다고 했고 서너명이 간혹 부르거나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목소리를 가늠해 보건대 부른다고 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훌륭한 립씽크꾼들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부르지 않는 이유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유가 한결 같았다.

'나 혼자 크게 부르면 쪽팔리고 창피하다. 처음 왔을 때 크게 불렀다가 친구들이 쳐다보고 웃어서 그 후론 부르지 못하겠다'
'튀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뭐라고 한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데 나만 부르면 민망하다'
'옆에 있는 애가 부르면 부르고, 안 부르면 나도 안 부른다'
'애국가가 이상하고 재미없다. 흥도 안 난다'
'조회가 길어서 노래 부르기 전에 이미 지쳐 버렸다'
'귀찮고 혼자 부르면 쪽팔린다'
'애들 모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하는데 나 혼자 해 보았자 쪽팔리고 재미없다. 딴 사람이 크게 부르면 나도 크게 낼 것 같긴한데'
'심심할 땐 부른다. 큰 소리로 부르면 창피하니까'
'크게 부르면 힘들다'
'애국가가 불쌍하니까 불러주자'
'가사가 유치찬란하다. 요즘 아이들의 취향으로 바꾸면 좋겠다'


반면 부른다는 녀석들은 설문지를 의식해서인지, 비록 배우고 들은 어눌한 국가관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학교를 대표하는 노래를 불러야 소속감이 생기고 국가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다는 내용의 글을 장황하게 썼다. 청출어람이라고 삐딱한 교사보다 나은 제자들이다.

아직 어린 녀석들이라 귀담아 듣기에 황당한 것도 있고, 이러다가도 경기장이나 다른 장소에서는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할 것 같아서(국제 경기같은 경우) 이런 저런 가치를 두고 생각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한 단면을 보면서, 애국가도 이젠 노래 부르기를 요구하지 말고 음악만을 경건하게 틀어주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나 먼저 담합해본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애국가와 교가를 큰 소리로 부르라고 강요하거나 다시 반복시키는 국가주의에 기초한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애국가나 교가를 신명있게 부르라고 부르짖을만한 단순명쾌한 결론이나 진리를 찾기가 힘든 요즘, 소속감이라는 것이 다소 촌스러워진 다원화된 세상만큼이나 아이들도 난해하고 복잡해졌다.

아니, 이들과의 코드를 잘만 찾아 이해하면 되는 것을 다소 엄살 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털처럼 가벼운 아이들의 국가관이나, 한낱 귀찮고 쪽팔리는 정도로만 겨냥되는 아이들의 의식이 섭섭하고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특히나 스승의 날, 스승의 노래에도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아이들의 입을 보면서 새삼 무색했던 건 반드시 내가 국가관보다 직업관이 더 강해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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