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턴의사가 본 폐업철회 51.9%

"의사집단은 외부로부터 깨져야 합니다"

등록 2000.06.26 11:38수정 2000.06.2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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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병원은 폐업지속이예요. 전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전국적으로 의사협회 폐업 찬반 투표가 실시되고 있던 6월25일(일) 밤 9시. 막 개표를 마친 서울중앙병원 인턴 이 모씨는 만나자마자 결과부터 알렸다.

오늘부터 병원 정상 진료한다

같은 시각 전체 상황도 폐업지속 쪽이 약 1000표 정도로 우세한 상황. 황당한 것은 '올바른 의약분업 실시'를 주장하는 의사들이 이상하게 지역에 따라 다른 판세를 연출한 점이었다. 영남 쪽은 폐업지속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고, 호남 쪽은 전반적으로 폐업철회가 우세하다고 그 인턴은 전했다. 서울 경기의 경우 팽팽한 상황. 다만 큰 병원의 경우 속속 폐업철회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고대병원 7:3, 이대병원 6:4, 연세 세브란스 5.5:4.5 로 폐업 철회가 우세)

한 레지던트의 케찹 친 당근론

서울 중앙병원 전공의들은 25일 오전 9시부터 밤 8시30분까지 폐업찬반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당초 예상은 무난히 폐업철회쪽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폐업을 계속해야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강경한 입장의 한 레지던트가 일어나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그동안 정부의 당근에 넘어가지 말자고 그렇게 말해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며칠전 이한동 총리를 중심으로 당근을 던졌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거부했죠. 그런데 이제는 대통령이 케찹을 쳐서 던졌습니다. 그러자 의사들이 케찹을 보고 핫도그인줄 알고 덮석 물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핫도그가 아닙니다. 당근에 케찹을 쳤을 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터져나오는 박수소리.

물론 폐업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결론은 6:4. 폐업 지속 330, 폐업 철회 260으로 서울중앙병원은 폐업을 지속해야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로 결론이 나왔다. 그때 시각이 저녁 8시30분 경. 인턴 이씨는 '암담했다'고 전했다.


'의권'이 '건강권'을 압도하는 상황

이씨는 처음부터 이 폐업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의권이 보장돼서 의사들이 좋은 환경에서 환자를 볼 수 있어야 국민들의 건강권도 향상될 수 있다는 단순하고 말도 안되는 논리.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의사의 '의권'은 국민의 '건강권'의 하부논리일 뿐입니다. 의권과 건강권이 충돌하면 건강권이 우선되야 해요."

그는 의권과 건강권의 선후 관계가 뒤바뀌는 현실, 그것도 배웠다는 동료집단인 의사들에 의해 그렇게 되고 있는 현실에 암담해 하고 있었다. 맥주를 앞에 두고 시작한 인터뷰. 그는 불만이 많아서인지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앞으로 병원노조에서 파업할때 불평 한마디라도 해봐라. 직원들이나 간호사들이 파업하면 얼마나 난린데요. 어떻게 환자를 놔두고 저럴 수 있냐는 둥. 지금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대부분이 병원노조의 파업때 다 한마디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의사집단의 잘못된 점을 꼬집는 인턴의사. 하지만 의사집단에서 인턴은 거의 힘이 없다. 이제 의사면허증을 딴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턴의 말이 군대와 같이 위계질서가 엄격한 의사사회에 얼마나 먹혀들까.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응급실 근무를 핑계로 98%의 폐업찬성을 보였던 폐업 찬반투표에 참석 안하기, 전공의 사직서 안쓰기,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의사협회 지지방문때 방명록에 이름 안쓰기였다. 아주 작지만 개인으로서 눈치보면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다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시기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자괴감이 있는 듯 했다. "인턴 한명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그것이 현재 유일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의사집단은 외부로부터 깨져야 한다"

"이번 사건은 무식하면서 자존심만 쎈 집단이 뭉치면 얼마나 막무가내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는 인터뷰도중 '무식한 의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의사가 무식하다? 그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무식하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의사는 무식했다'. 의료적인 지식 말고는 다른 부분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간호사 선생님들이 레지던트들을 보고 놀랍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보고요. 처음 인턴 들어왔을 때 그렇게 똘똘하고 친절하고 재미있던 사람이 레지던트 2년, 3년차를 지나며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지난 6월24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의협회관에 있었다. 의협회관은 이번 의사폐업 투쟁의 중심인 곳. 전국 병원에서 의사들의 집단적 지지방문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들이 부르는 투쟁가가 끊이지 않았다.

"'철의 노동자'를 개사해서 '철의 전공의'를 부르는 것까지는 봐줄수 있었지만 '님을 위한 행진곡'을 개사해서 부를 때는 정말 듣기 힘들었습니다. '앞서서 나가니 전공의는 따르라'할 때는 정말… 역겨웠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보건의료계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보건의료계의 한 주축인 의사집단은 '싹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제 전 병원에 대한 세무사찰이 하나둘씩 들어올 것이고, 의료계의 비리가 하나둘씩 들추어지겠죠."
"그러면 강경파들이 또 득세하지 않을까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예전에 한 선배와 의료계의 개혁에 대해 논쟁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나의 주장은 이랬죠. 의사집단은 외부로부터 깨져야한다. 내부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선배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번 의료계 폐업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암담한 불신

이번 폐업은 처음부터 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와는 별개로 이번 폐업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에 대한, 약사에 대한 불신 끊없는 불신이었다.

26일 새벽, 최종 집계가 51.9%로 폐업철회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폐업철회로 결정이 났답니다."
"다행입니다. 몇퍼센트래요?"
"51.9%랍니다."
수치를 들은 그는 "다행지지만 슬슬 조작설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대한전공의협의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최종집계가 발표된지 채 20분이 안된 시간. 하지만 벌써 게시판에는 '투표결과는 조작되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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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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