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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시인은 신동호를 "투쟁!"이란 선창 구호와 함께 '소양강 처녀'를 걸판지게 부르던 '코끼리 같은 덩치'의 열혈청년으로 기억한다.
문학평론가 방민호 씨는 신동호를 한마디로 평해달라는 요구에 별 망설임 없이 "그는 애련(哀憐)의 시인이지요"라 답한다.
'곤'(鯤)을 닮은 소년
신동호(36세)를 볼라치면 장자(莊子)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에 등장하는 물고기 '곤'(鯤)이 떠오른다. '북쪽 깊은 바다'에 사는 수천리 길이의 거대한 물고기. 범인(凡人)을 뛰어넘는 배포와 느릿느릿 하지만 신념에 찬 목소리와 몸짓이 그러하다.
그가 떠올리는 유년은 고향인 강원도 화천의 물빛으로 시작된다.
화천댐 바로 밑에 그물을 치고 "아저씨"라고 외치면 댐을 관리하는 동네 아저씨가 수문을 잠시 열어주었다 한다. 그물은 소년이 들 수도 없을 정도의 물고기로 가득 찼고 동네엔 매운탕 잔치가 벌어졌다. 그가 말하는 '화천식 특수어획법'이다.
그 댐 주위를 자주 서성이던 우울한 사춘기. 그는 멀리 전라도에서 거기까지 와 자살한 남녀의 시체를 본다. '아,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허망한 것이구나'. 직접 목도한 죽음은 어린 그의 정신적 키를 훌쩍 키운다.
중.고교 시절 그는 공부도 싸움도 다 잘하는 '시골 수재'였다. 강원고등학교 1학년 때는 난생 처음 쓴 '가을 산'이라는 시로 학내 백일장에서 차상을 받는다. 시는 그에게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썰물처럼 왔다. 선배들이 회유 반 공갈 반으로 권유한다. "임마, 너 문예부 들어와라".
문예부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동안 담배와 술을 배웠다. '프란츠 카프카'와 '쟝 폴 싸르트르', '알베르트 카뮈' 따위의 실존주의 서적을 난독하며 마음껏 의기양양했다. 그 의기양양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어주듯 고교 3학년 땐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에 '오래된 이야기'로 당선까지 된다.
신 시인에게 물었다. "당신 시의 뿌리는 무엇인가?"
예의 그 느리고 굵직한 음성으로 그가 답한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친구들 연애편지 대필을 200통은 넘게 했다. 한 사람의 사랑이란 그 하나하나가 우주보다 더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것 아닌가. 그런 사랑을 200번이나 대리체험 했으니... 산적같았던 나를 시인으로 만든 건 친구들이다".
질풍노도의 시대, 그리고 절망의 시간들
화염병과 이데올로기, 주체사상과 변증법, 멀기만한 이데아와 피 흘리는 아스팔트.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85년은 대놓고 시를 쓰는 것이 '죄스러운' 시대였다. 마음껏 시를 쓰러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눈치를 보며 시를 써야했다.
그가 말한다 "그 시절엔 낮에는 돌 던지고 밤에는 학교(한양대학교) 근처 '비발디'라는 카페에서 숨어서 시를 썼다. 일종의 이율배반이었다".
문학과 학생운동을 합리적으로 결합해 내는 것이 아직은 어렸던 그에겐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86년에서 88년까지 이어지는 잇단 체포와 구속, 어머니의 수술과 투병은 '모든 것은 시대탓'이라 돌려버리기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던 늙은 아버지가 하나뿐인 아들 신동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동호야, 죽어서의 눈물보다 살아서의 기쁨을 줄 수 없겠니?"
목이 메인 아픔으로 편지를 읽곤 학생운동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런 아픔이 그 하나만의 것이었을까?
88년 발행된 무크지 '녹두꽃'은 그에게 '문학을 가지고도 사회변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다소간 염세적이고, 현학적이었던 그의 시가 관념의 앙상한 뼈대에 '삶의 살점'들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는 생각을 바꾼다. "문학은 즐겁게 해야 한다. 내가 즐거워야 독자도 즐거울 수 있다".
89년엔 윤석재(고려대 85학번) 등과 함께 '전국대학생문학연합'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어 90년 여름엔 통일선봉대에 참석, '항일무장투쟁에서의 연극과 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그를 눈여겨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간부들에 의해 전대협 사무국 문화담당으로 발탁된다. 그해 겨울 전대협에 문화국이 생기고 그는 초대 국장이 된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역설했다면, 그는 시인의 정치참여를 실천한 셈이다.
그는 첫 시집을 감옥에서 받아본다. 91년 '박성희, 성용승 방북사건'으로 검거.구속된 그를 면회 온 선배들은 신동호의 처녀시집 '겨울 경춘선'을 건넨다. 그때의 심정? "눈물겨웠다".
그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물었다.
"아내(허정숙. 경희대 성악과 졸)와는 학생운동하면서 만났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땐 그녀가 편지를 쓰고 면회를 오고,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땐 내가 그 일을 했다. 그때 주고 받은 편지가 300여통은 된다. 내게 있어 그녀의 감옥행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시도 썼다. 그녀와의 결혼은 어찌 보면 당시 유행했던 동지적 결합이랄 수도 있겠다".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로 기억되는 때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낙향해 살던 94년과 95년이다. 온나라가 찜통같이 더웠던 94년. 그는 매일매일을 술만 마시고 세월을 축내던 폐인이었다. 아내가 피아노 강사와 봉투 붙이는 일을 해 근근히 생활을 해결하던 궁핍, 딸아이의 분유값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절대적 곤궁의 시기.
그리고 95년. 아직도 남아 있는 운동에 대한 열정과 문학에 대한 짝사랑 탓에 까맣게 말라가던 춘천의 그를 전대협 초대의장 이인영 씨가 찾아왔다. 사흘을 서로 아무 말 안하고 술만 마셨다. 그 술자리 끝에서 이 씨가 말했다.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니?"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95년 재상경한 그는 '문학예술청년공동체'를 만드는데 주력한다. 그와 그 시절 친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문.예.청'은 '한강에 평화의 뗏목 띄우기'행사 등도 주도하는 그럴듯한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회원도 많이 늘었다. 영화 '질주'의 감독 이상인, 애니메이션 연출가 전승일 씨 등 감독과 문인, 화가를 망라한 젊은 예술인 400여명이 '문학예술청년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심이 지대하다. 93년부터 독학으로 배운 컴퓨터 실력은 이제 간단한 프로그램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대상이 모호한 상대와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학과 컴퓨터는 공통점이 많다"라 말한다. 곧 컴퓨터 관련 서적도 집필 예정이다.
그는 무엇보다 우선해 시인으로 불리는 걸 기꺼워한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쓸 것인지 물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책중에 하나가 조지훈의 '지조론'이다. 나는 '예술가적 글쓰기'보다 '지사적 글쓰기'를 지향한다".
너무 포괄적이고, 광의의 개념이 아닌가 재차 물었다.
"어렵게 생각마라. 윤동주, 이육사, 조태일, 김남주 등이 다 시인이기 이전에 지사 아니었나. 그들처럼 쓰고 싶고, 그들의 삶을 닮고 싶다".
음, 윤동주와 이육사, 조태일과 김남주라... 알 듯도 하다.
그와 처음 만나 명함을 교환할 때 사실 좀 놀랬다. 'ebookall.com 기획이사 신동호'.
아무리 벤처기업이지만 이사라면 굉장히 높은 직위 아닌가? 그가 머쓱해하며 답한다.
"인터넷은 정보의 공유와 민주화라는 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소속된 회사는 문학이라는 컨텐츠를 'E-book'(전자출판서)으로 만들어 인간의 역사적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까지도 평등히 공유하고자 한다.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인터넷이 전혀 별개의 코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와 학교를 다닌 시기, 태어난 년도만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도 유행처럼 불려지는 '386 세대'이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실망스런 술자리로 우리가 그들에게 건 꿈과 기대를 단숨에 깨준 여느 '386'들과는 달라 보인다. 사연과 질곡 많은 그의 삶, 그것들에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온 그의 이전 생(生)이 위의 예측을 억측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써야할 시가 있는 한, 그가 사랑하는 이 땅과 아내, 제 몸보다 귀하다는 우영(딸. 8세), 신목(아들. 3세)이 곁에 있는 한, 신동호가 아직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혁명에의 낙관'처럼 우리도 그, 청년 신동호를 '낙관'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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