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초 북송 앞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할머니

"젊은이들이여, 통일사업 열심히 하라"

등록 2000.08.04 17:10수정 2000.08.0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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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실공비' '마지막 빨치산' '남장 빨치산' '이념의 희생양' '봉천동 만남의 집 살림꾼' 등의 수식어가 붙은 정순덕(67. 여) 할머니를 만났다. 오는 9월초 남-북 합의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희망자' 58명 속에 그가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최근의 심정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더욱 궁금하던 차였다.

기자는 여름 휴가를 뜻 있게 보내고 싶은 생각에 베낭을 메고 천리길을 나섰다. 이산가족 교류상봉 등 남북화해 분위기가 높은 '역사적인 달' 8월의 첫째날이었다.

'비전향 장기수'라고 하면 사회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로 인식되기 쉽지만, 의외로 쉽게 그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진주에서 서울까지 가면서 줄곧 '인터뷰가 안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버스가 내뿜는 연기만큼이나 사라지지 않고 따라 붙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간다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여느 언론과 달리 고향에서 온 기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2동 나사렛한방병원 505호실. 처음엔 잘못 알고 605호로 갔다가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그 할머니, 5층에 계세요'라고 말했다. 6인실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병실 안에 있던 모두는 기자를 쳐다 보았다. 한 환자가족 보호자가 '누굴 찾아 오셨어요'라고 묻자 '정순덕 할머니 계십니까'라고 했더니, 다들 '할머니는 인기가 좋아서 또 사람이 찾아 왔네'라며 병상을 가리켰다.

창문 쪽에 있는 병상의 주인은 막 저녁 식사를 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어요"라는 간단한 질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상의 주인공은 '누가 오더라도 두려움 없는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주에서 왔다는 말에 그의 첫 마디는 "진주사람들이 아직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였다. 그러면서 몇몇 사람의 이름을 들먹였다. 10여년전 진주문화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담당자의 이름까지 분명히 기억하며, "잘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진주사람들에 대해 어떤 '경계심'을 갖는 데는 까닭이 있다. 가족들이 당한 고통뿐만 아니라 85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90년에 들어 단행본 출간 등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자 전직 대공경찰관들이 '반발'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 정순덕> 출간과 방송 출연 등 '마지막 빨치산'으로서의 그의 삶 자체가 세간의 재조명을 받을 때였다. 반면 그녀의 생포자 가운데 한 사람은 90년 3월께 '이데올로기의 산증인'이란 빛 바랜 명성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무렵 전직 대공경찰관 친목단체 회원들은 각계에 진정서를 내 반발하는 등 '분단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후 그 전직 경찰관은 각계로부터 성금이 모아져 병원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았다.

반면 정순덕은 다시 '숨어드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진주에 살지 못하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의 서울 생활 역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봉재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왔다. "봉재공장 '시다'를 5년간 했지. 그러다가 봉천동 '만남의 집'에 밥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갔던 거야."


과거에 대해 지금은 어떤 생각인지를 물었다. 제일 궁금했던 것은 63년 그녀를 생포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나에게 총을 쏜 사람들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아직까지 밉다. 좋은 생각이야 들겠어. 그때 수류탄 한 방이면 모두 죽었을 꺼야. 자기들도 죽고 나도 죽고 말이야. 어떨 땐 수류탄 하나 까 버리지 못한 게 한이 될 때도 있어."

그녀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아프다. "남동생이 덕산에서 학교 다녔지.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몰라. 동생이 그 뒤에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짐작할만 하지. 고향에 살지 못하고 서울 와서 살잖아. 어머니 모시고 사는 동생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사람 앞 일이란 모른다'고 말이야.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 줄 알아. 우리가 통일이 안되고 영원히 이대로 있을 같애. 사람 앞 일 생각하면 누구나 구박할 수 없는 거지."

한마디로 "가족들이 내 때문에 고향에 살지 못하고 타향에서 사는 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과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은 사람은 '세상 일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으로 비춰졌다.
북으로 가는 문제에 대해 어머니나 동생과 상의했느냐는 말에 또 가족 걱정을 했다. "아직 안했어. 앞으로 해야지. 아마 이야기 하면 못 가게 할지 몰라. 가기 전에 이야기 해야 할 건데 노모를 어떻게 설득할지 걱정이야."

북에 왜 갈려고 하느냐, 가서 뭐 할 거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녀는 이념이며 사상과 거리가 먼 말부터 한다. "다리도 제대로 못 쓰고 반쪽 몸을 제대로 못 쓰는데 뭐 하겠어. 치료나 받는 거지. 아무 활동도 못할 꺼야."

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 통일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북으로 간다는 의미로 들렸다. "남쪽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되물어도 "치료나 받는 거지. 뭐"라고만 되풀이했다. 13년간 산에서, 23년간 감옥에서, 그것도 모자라 평생 분단의 비극을 안고 살아 온 그녀에게 "왜 북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을 수조차 없었다. 누군들 이 지경까지 만든 사회에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고, 기회가 주어졌는데 가지 않는 '바보'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 병상에서 간병인들이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눌 때 정순덕 할머니가 한 마디 던졌다. "조금씩 먹어요. 많이 먹는다고 오래 사는가. 건강하게 살아야지." 이 말은 훈장의 가르침처럼 들렸고, 모두들 조용해졌다.

요즘 남북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남북정상이 만나면서 이젠 원수도 없어졌지. 앞으로 남북문제는 잘 풀릴 거라고 봐. 이런 시기가 빨리 와야 하는데 너무 늦었어. 통일 분위기가 되었으니까 내 조국을 찾고 외세 없이 통일이 되도록 해야 해.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도 물러가야 한다니까"라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말을 내 뱉았다. "통일 사업 열심히 하라고 해. 지금 우리 민족에게는 딴 말이 필요 없어. 통일하는 일이 제일 큰 과제야. 전문가들만 나서서 통일사업 하는 거 아니거든. 모두 나서서 통일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해주기를 바랄 뿐이지."

정순덕 할머니는 통일은 곧 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진주에 기억에 남는 사람도 많구, 지금도 이름 대면 알만한 사람도 많지. 죽지 말구 살아 있어라고 해. 곧 통일 될 테니까. 그 때 만나자고 해.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사업도 열심히 해야 하고 말이야." 정순덕 할머니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볍다면서 북으로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리산 계곡처럼 깊이가 있었고, 능선처럼 힘이 있었다. 그러면서 얼굴은 환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맑아 보였다.

13년간 지리산에서, 23년간 감옥에서, 지금은 병상에서...

<정순덕은 누구인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뒤 다시 생포된 곳이 바로 지리산 내원골이다. 내원골 중에서도 가장 깊다고 하는 '안내원'에서 태어난 정순덕은 열여섯살 되던 해인 1950년 결혼을 한다. 인근 산청군 시천면 사리(일명 덕산)로 시집을 간다.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이 있는 마을이다. 신랑은 그녀보다 한 살 많은 성석조. 결혼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덕산 일대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자 성석조는 이른바 '부역'을 하게 된다.

그 뒤 국군이 덕산 일대를 점령하자 성석조는 '부역'한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결혼 6개월의 신부는 그해 12월 겨울 남편의 겨울 웃을 챙겨 산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남편과 지리산에서 지낸 날짜는 겨우 20여일. 남편을 잃은 정순덕은 13년이란 세월 동안 지리산을 누빈다. 누군가는 '짐승처럼 누볐다'라고 표현했다.

정순덕은 이홍이와 내원골에 있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때는 63년 12월 11일 새벽 1시. 내원마을에 잠복 중이던 박기덕(산청경찰서 대공경찰)과 김영국(삼장지서장)은 두 명의 마지막 빨치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자리에서 이홍이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정순덕은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 감형되어 85년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지리산 빨치산 생활 13년, 감옥 생활 23년을 살았다. 비전향장기수의 삶터인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살다가 99년 3월 20일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한 달만에 깨어나 지금은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만남의 집' 살림을 맡았던 할머니를 돕기 위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보라매병원의 치료비는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와 양심수후원회에서 지원했다. 후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무료치료를 제의해 이루어졌다. 간병인은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마비된 팔과 다리를 복구하기 위해 물리치료 겸 한방 치료를 받고 있는데, 상태가 점점 나아진다고 한다. 처음에는 밥도 손으로 직접 떠 먹지 못했는데, 지금은 오른손으로 식사도 혼자서 해결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후원 연락처 / 02-873-4408(만남의 집) / 국민은행 008-01-0579-881(예금주 권오현)

덧붙이는 글 후원 연락처 / 02-873-4408(만남의 집) / 국민은행 008-01-0579-881(예금주 권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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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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