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배운 게 죄지, 뭘 잘못했길래"

해고통보받은 KBS 청소 아줌마의 독백

등록 2000.09.02 11:34수정 2000.09.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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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동안 KBS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살았는데 하필이면 힘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가 나가야 합니까? 올해 흑자가 1천억원이 넘는다는데..."

9월 1일 오후2시 신관 공개홀에서 열린 사내개혁촉구와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집회에서 환경직 조합원 김씨는 이렇게 절규했다.

"자기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힘없는 우리를 자르는 것은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무식하지만..." 두눈이 축축하게 젖어있던 김씨는 끝내 물일로 거칠어진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날 집회에는 본사 환경직 조합원 50여명만 아니라 중앙위원과 일반 조합원 등 모두 10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해 회사가 정리해고 방침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현상윤 위원장은 투쟁사에서 10년, 20년 젊음을 바쳐온 직장에서 쫓겨날 때 우리가 싸우지 않고 무엇을 하겠느냐며 권력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경영진을 축출하기 위해 5천 조합원이 한마음으로 싸울 것을 선언했다.

현위원장은 또 "이번 싸움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KBS가 추구해온 양심과 도덕의 문제라며 사회적 약자인 환경 조합원을 쫓아내는 KBS가 어떻게 인권과 사회정의를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정미정 여성대표 중앙위원은 "정리해고 대상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차별이라며 한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환경 종사원들을 지원하는 KBS지원협회는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인 KBS를 쓸고 닦는 일에 청춘을 바쳤고 평생을 오직 한마음으로 성실히 살아온 우리의 가족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들은 일생을 KBS에 오직 한마음으로 봉직했지만 승진도 없었고 포상도 없었다. 다만 편견과 외면, 그리고 무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힘없는, 그래서 서러운 그들의 아픔을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하고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고 이대로 그들을 보내기에는 그들의 슬픔과 우리의 아쉬움이 너무나 깊다. 이제는 우리가 힘없는 그들을 위해 힘이 되어야 할 차례이다. 그들의 정성어린 환경미화 작업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듯이. 우리 KBS 시설 내에서 일하는 모든 이는 이들 환경요원의 눈물어린 호소에 더 이상 귀를 막지 말고 눈을 돌리지 말길 바란다.'

한편 오늘 오전 10시에 열릴 KBS 직원 월례조회는 조합과 환경종사 아줌마들의 항의농성으로 전격 연기되었다. KBS 박권상 사장은 6층 사장실에서 1층 행사장에 얼굴도 비치지 못하고, 한달에 한번 열리는 월례조회를 연기시켰다.

KBS는 9월 3일 방송의 날을 맞아 박지원 문광부 장관 등 정치인 및 언론인들이 참석하는 기념식을 9월 4일 KBS에서 열 계획이고, 이 행사에서 조합과 환경종사 아줌마들은 강력한 농성을 전개할 계획이어서 마찰이 예상되고 있다.

다음은 한 조합원의 글이다.

한 조합원의 독백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학교 갈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기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챙겨서 새벽 4시 첫 차를 타고 20여년을 한결같이 출근해 쓸고 닦았던 내 직장 KBS. 그런데 이젠 그만 나가라고 한다.

못 배우고 못난 나를 이렇게 받아줘서, 언제나 감사했고 사장님과 회사에 보답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지 다짐하며 살아왔는데…

빗자루와 밀걸레를 손에서 떼본 적이 있을까? 냄새나는 화장실 일이 싫어본 적이 있을까? 내 일이기에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해왔고, 비가 오면 비가 샐까, 내 집처럼 우리 집 안방처럼 쓸고 닦으며 젊음을 보낸 내 일자리였는데…

KBS 덕분에 사랑하는 아이들은 청소부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줄 아는 의젓한 청년들로 성장해줬고, 병든 남편 뒷바라지도 힘들지 않았다. 직원들이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는 사명감에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왔고, 오랜 걸레질로 허리가 쑤셔오고, 다리가 아파도 '수고하십니다' 한 마디에 힘든 걸 잊었는데.

정리해고라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뭔가 잘못됐겠지, 이럴 수는 없는데. 힘없고 못 배운 우리를 먼저 쫓아낸다니. 뭘 잘못했을까? 20여 년을 한결같이 잡아온 빗자루가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쓸어도 쓸어도 그 자리다.

엊그제 군을 제대하고 곧 대학에 복학해야할 큰아들 학비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병든 남편과 우리 자식들에게는 이제 뭐라고 말해야 하나…

덧붙이는 글 | 환경종사자들은 대부분 여성이고, 이들이 한 집안의 가정이기에 정리해고와함께 한가정의 파탄은 불을보듯 뻔한 상황이다. 많은 지지와 애정 부탁합니다.

덧붙이는 글 환경종사자들은 대부분 여성이고, 이들이 한 집안의 가정이기에 정리해고와함께 한가정의 파탄은 불을보듯 뻔한 상황이다. 많은 지지와 애정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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