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들이 본 노약자석 사건

"자리양보 하면 '착한 척한다'고 왕따당한다"

등록 2000.09.18 02:10수정 2000.10.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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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로부터 '노약자석 사건'에 관한 기사요청을 받았다. 내가 중학교 교사로 교육현장에 있으니 이 사건에 대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탁이었지만 왜 난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류의 사건이 터지면 즉각 나오는 '요즘 아이들은...'이라는 일반화 경향이 다소 걱정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명명백백한 '노인을 발로 차 숨지게 한' 중학생의 잘못을 같은 또래라고 해서 우리 아이들이 별반 다르게 생각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관련기사 1 : 중3생에게 구속영장 신청되던 날--노약자석 사건 전말
관련기사 2 :노약자석 앞에서 당신은

어쨌든, 모처럼 학급 편집부 회의(학급신문)가 있어서 관련기사를 복사해 나눠주며 아이들 소리를 들어 보았다. 내 짐작대로 그런 극단적인 사건에 대해 아이들은 납득하기 힘들어 했고, 사건의 당사자에 대해서는 평범한 아이였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담임인 나는 "나는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요즘 아이들의 욱하는 성질'에 대한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오히려 '요즘 아이들은 욱하는 성질이 심하다'라는 일반화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여버린다. 나만 무색해졌다.

선생님이나 친구가 말 한마디 하면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생각 없이 말하는 것도 결국 이런 아이들의 모습과 관련 있는 것 아니냐고 어른스럽게 얘기하는 녀석도 있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이유도 안 듣고 화를 내거나, 싸우려 든다고 했다. 이거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다. 그런 건 내가 해야 할 소리 아닌가.

우리가 정리한 의견을 모아보면, 노인을 밀어버릴 정도로 아이가 화가 난 이유는 바로 지하철에서 창피를 준 것을 못 참는 요즘 아이들의 성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모욕과 멸시를 당했으니 누가 참겠냐고, 그 점은 "할아버지가 요즘 아이들을 몰라서 잘못한 것"이라고 했다. "너희들은 개인화 성향이 강한 세대인데 왜 그토록 남을 의식하냐"고 묻자 이쁘게 치장하고 외모를 꾸미는 것도 결국 남 앞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 아닌가, 결국 '나' 때문에 더욱 '남'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우린 지하철에서, 혹은 버스에서 좌석에 얽힌 많은 사건을 경험한다. 나도 그랬고, 아이들도 그렇다. 우리 반 지민이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지민이는 지하철에서 문 옆에 서 있었는데 오빠들 셋이서 노약자석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오자 일시에 갑자기 자는 척하더란다.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 웃겼다. 들어온 노인은 노약자석 옆에 섰다. 그러자 건너편 노약자석에 있던 나이 드신 분이 보기 뭣했는지 '요즘 젊은 애들은' 하며 자리를 양보하라고 짐짓 나무랐던 모양이다.

자는 척하던 청년들이 듣기 싫고 곤란하니까 화를 내며 "재수 없다"고 자기들끼리 두런거렸다. 이걸 본 그 분은 더 화가 나 목소리를 높여 꾸짖고, 오히려 서 있던 노인이 괜찮다며 말리는 판국이었다.


청년들은 노골적으로 욕설을 섞어 말을 하고, 결국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네가 뭔데, 지랄이야"하며 내렸다. 큰일날 뻔했다고 사건을 전하는 지민이를 보며 우리가 이제 어른 역할을 하려면 목숨을 내맡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그랬다. "요즘에 자리 양보하면 착한 척한다고 재수 없다는 소리 듣는다"고. 내가 황당해서 아연실색을 하니까 아이들은 덧붙였다. "다 그냥 앉아 있는데, 자기만 착하게 보이겠다고 자리 양보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냐구 재수 없대요." 이젠 그런 소리 무서워서라도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 오는가.


미칠 노릇이다. 이제 우리는 내 양심의 편안함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까, 그냥 앉아 있을까를 고민할 시기는 지났나보다. 이제는 자리를 양보하면 눈치가 보일까 안 보일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잘못한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옳은 것을 봐도 비죽거리는 이런 세상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두렵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옳은 것, 바른 것을 행하는 아이는 '착한 척'하고 밥맛 없는 아이가 되어 가는 그런 현장에 나는 서 있다.

내키는 대로 뻗지르는 못된 심사가 지하철에서 가능한 것은 혹시 구정물이 나에게 튈까 몸 사리며 두려워하는 이런 문화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이런 사건이 있는 현장에서 목소리를 함께 내어 본 일이 있는가. 아마 나처럼, 그러다가 욕먹고 망신당하느니, 모른 척하자고 참거나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문제해결법으로 이런 것을 제시해 보면 어떨까?

첫째, 노인들이 자리 양보를 당연시하는 예전의 망령된(?) 생각을 버리고, 자리를 양보하면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아는 현대인의 세련됨을 가짐으로써 문제점을 극복한다.

둘째, 학교교육에서 젊은이들에게 삼강과 오륜을 재인식시키고, 자리 양보할 때마다 노인의 사인을 받음으로써 봉사점수 및 승진점수 등의 이점을 준다.

셋째, 노인층 인구 확대를 대비하여 노약자석 확대 및 노인석 착석 금지령을 내린다. 또한, 신고제를 병행해 고발자에게 상금을 준다.

넷째, 박카스 선전을 24시간 틀어댄다.(요즘 실제로 부쩍 늘어난 것 같던데......)

이런 해결법을 나열하고 있자니 나 자신 가슴이 아프다. 우리 모두는 노약자석 사건같은 것을 대할 때마다 지울 수 없는 멍을 하나씩 새기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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