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돌담 속에 숨겨둔 추억

등록 2000.09.30 23:24수정 2000.10.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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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저희 집엔 대문이 없습니다. 그런 저희 집엔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뒤로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그 동산엔 아주 큰 꿀밤나무 몇 그루, 백일홍 나무, 대나무, 힘겹게 가지 하나를 저희 집 지붕 위로 뻗히고 있는 늙은 소나무, 조그마한 감이 달리는 감나무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였던, 몇백년이 되어서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저희 조상님들과 똑같이 떡을 한 그릇 대접받던 정자나무가 있습니다.


마당이 있고 동산까지 있으니 우리 집은 제법 넓은 집입니다. 그러나 그 집을 감싸고 있는 담은 모두 돌담입니다. 사람이 하나 하나 쌓은 돌담이지요. 그 담을 언제 누가 쌓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 돌담 곳곳은 모두 제게는 모두가 사연이 있는 귀중한 곳이지만 모두가 좋은 추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게 제일 괴로웠던 순간은 아마 학교를 마치고 집 입구쪽에 있는 돌담길을 돌아서는 순간 요란하게 돌아가는 탈곡기소리를 듣는 일일 겁니다. 벼를 탈곡하고 난 빈 볏집을 한아름 지고 정자나무가 있는 동산으로 운반하는 것이 제게 맡겨진 소임(?)이었습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빈 볏집을 하나 하나 지고 동산까지 운반하는 일은 제게는 악몽(?)그 자체였지요. 그러니까 우리집 입구쪽의 돌담길은 제게는 쓰라린 장소가 되었네요.

그 쓰라린 곳을 약간 지나면 앞집 감나무가 가지를 내리고 있는 돌담이 나옵니다. 어린 시절 아마도 1000원짜리 지폐는 제게 큰 돈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다 한 두개 생기면 전 어김없이 그 편편한 돌이 많았던 돌담길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 담길을 지날 때마다, 그 뿌듯함이란...

그러니까 그 돌담은 제게 든든한 금고역할을 해주었지만, 비상사태(?)에서는 제 소중한 돈을 잘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열심히 구구단을 외고 있는데 창 밖에 굵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는 하루종일 세차게 내렸고 그제서야 전 돌담에 꼭꼭 숨겨둔 나의 재산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 때의 절망감과 초조함이란... 그 때만큼 비가 원망스러웠던 때가 또 있었을까요?

그 감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곳을 지나면 우리 집 마당과 연결되는 돌담이 있습니다. 그곳엔 조그마한 절구통 비슷한 물을 모을 수 있는 돌이 있었고 그 밑엔 어김없이 숫돌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른들이 이른 아침 일을 나가시기 전 낫을 갈았던 것입니다. 그땐 참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살았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는데, 지금 우리 시골집은 그 많은 어른들이 계시지 않습니다. 한 며느리와 코흘리개 아들이 이제는 그 집의 주인인 셈입니다.

돌담길은 엉성하지만 그 모든 추억들을 간진한 채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꿋꿋하게 서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돌담을 쌓는 할아버지를 옆에서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돌을 하나 하나 쌓으면서 제게 한번은 다음 돌을 선택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전 하나의 돌을 집어 들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의 돌을 쌓을 땐 그 곳에 가장 알맞은 돌이 아니면 절대 쌓지 말라"고요.

그렇게 돌 하나를 쌓는 데도 "최적"을 추구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엉성하게만 보이는 돌담은 벽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고 오래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돌담길은 수 없이 많은'최상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돌담길을 가진 우리집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요즘은 그런 정성을 찿아보기 힘듭니다. 동네 어귀에 호도나무가 담 밖으로 뻗어나와 군것질감이 특별이 없던 우리를 유혹하던 집이 있습니다. 어느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친구와 전 주인 몰래 그 담에 매달려 호도를 딸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제가 담에 매달려 호도에 손을 뻗는 순간, 담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 담은 엉성한(?) 돌담이 아니고 정교한(?) 신식 벽돌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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