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폭발 사고, 남의 일 아니다

'냉전족쇄' 제거에 이제 정치권이 나서라

등록 2000.10.04 09:46수정 2000.10.04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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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북한 병사들간의 우정은 이병헌이 대인지뢰를 밟은 데서 시작된다. 영화 속의 대인지뢰는 생명을 앗아가는 대신 우정을 맺어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 현실 속의 지뢰는 참혹한 재앙만을 안겨주고 있다.

잃어버린 두 발. 20여 년전 지뢰를 밟아 두 발을 잃어버린 고준진 씨. 지뢰는 그의 젊은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최근 들어, 대인지뢰 폭발로 인한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달 강화도 갯벌에서 아이와 함께 산책 중이던 고향방문객이 지뢰를 밟아 한쪽 발목을 잃은 데 이어, 지난 2일에도 강화도 해변가에서 지뢰를 밟은 행락객이 역시 한쪽 발목을 잃는 변을 당하였다.

그동안 지뢰 피해는 민통선 마을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강화도 사고에서 보듯이 수해로 인한 지뢰유실에 따라 언제 어디서 누가 지뢰폭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에 따르면, 전쟁 이후 남한에서 지뢰폭발로 사상한 민간인이 1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관한 정확한 통계를 밝히지 않고 있다. 더욱이 무고한 주민들이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참변을 당해도,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책임의 소재조차 가려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뢰사고로 큰 아들과 손자를 잃고 둘째 아들과 자신은 발목을 잘린 박춘영(73)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은, 사고 후 인근 군부대나 면사무소에서 단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고 보상금은 커녕 치료비 한푼 받지 못했다는 더욱 기막힌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민간인들이 해변이나 강가를 거닐다가 지뢰를 밟는 일도 그러하고, 그러고도 사과 한번, 보상 한푼 받지 못하는 이 야만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난해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묻혀 있는 지뢰는 모두 112만여발이며 이 가운데 후방 지역에도 6만8천여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국방연구원은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 매설된 모든 지뢰 제거를 위해서는 45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더라도 6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앞날에 대한 생각조차 없이 매설한 지뢰들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경의선 복원공사 착수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한반도에 매설된 이 엄청난 규모의 대인지뢰야말로 냉전시대가 낳은 비인도적이며 소모적인 대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 가치조차 불분명한 대인지뢰로 인해 비무장지대는 말 그대로 지뢰밭이 되고 말았고, 그 피해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이어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군인과 민간인,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인지뢰는 그 수명조차도 반(半)영구적이라는 점에서 지뢰 가운데서도 가장 비인도적인 무기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대인지뢰금지조약이 존재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대인지뢰금지를 위한 민간운동이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의 경각심은 아직 미흡한 상태이다. 한편에서는 지뢰제거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방부는 내년부터 2005년까지 2천2백26억원의 예산을 들여 한국형 지뢰살포기 113대를 구입할 계획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시 비무장지대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20마일 구간에 100만개 이상의 지뢰를 매설할 계획이라고 국제지뢰금지운동(ICBL)이 밝힌 바 있다.

대인지뢰의 제거를 요구하는 양심의 목소리들이 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풍(逆風) 또한 아직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인지뢰문제가 더 이상 특정 지역 주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최근의 연이은 사고에서 보듯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보다 광범하게 확산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인지뢰문제가 민간운동에서만 제기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치권에서 공론화되는 일이 시급하다. 지뢰사고 피해 확산에 대한 대책, 대인지뢰사고 피해에 대한 보상, 대인지뢰금지조약에 남북한이 함께 가입하는 문제 등이 이제 국회를 통해 공론화되고 합리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15대 국회 당시 민간기구의 대인지뢰금지조약 가입촉구 청원에 이부영 의원이 대표소개의원을 맡아 유일하게 서명한 적이 있을 뿐, 정치권에서 지뢰문제는 냉전시대가 남긴 성역으로 자리해왔다. 대인지뢰와 같은 군사시설에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냉전의 그늘이 우리 국회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치권도 스스로의 손으로 그 그늘을 걷어낼 때가 되었다. 지금 정치인들이 북한관광을 가는 일도 좋지만, 더 시급한 일은 여전히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이같은 냉전시대의 족쇄를 제거해내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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