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묵시록(默示錄)

무엇으로부터, 어떤 것으로 부터의 '조락과 상실'...

등록 2000.10.11 21:24수정 2000.10.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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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서리


나날이 엷어져 가는 햇볕에 겨울의 도래를 예감한 것인지 갓 자라난 어린 풀들도 이젠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추고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제각기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가을은 이런 들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의 묵시를 보여주는 듯 하다. 만일 아직도 한여름의 추억 속에 잠겨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지금껏 긴긴 방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면, 들꽃들이 자기의 때를 알고서 밖을 향해 뻗어 나가기를 그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스스로에게 가장 알맞는 꽃들을 피워내는 그 예지(豫智)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머잖아 가을이 올 것이고 그때 우리도 품안에 아름다운 꿈의 결실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때까지도 가슴 속에 알찬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어서 말라죽게 한 예수의 무서운 저주와 같은 날벼락 - 무서리가 때를 모르는 초목들 위에 얼마나 혹독하게 내리고, 얼마나 허망하게 그것들을 사그라지게 하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여름의 추억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찬란한 여름 햇살에 도취되어 인생의 가을을 예비하지 않으며 마침내 가을이 당도했는데도 마음 속엔 여름에 대한 추억만 간직하고 가을과 겨울을 애써 무시하며, 계절의 순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낙엽을 떨구게 하는 소슬한 가을바람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꽃봉오리를 피어나게 하는 봄바람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계절이 바뀜을 고통으로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월의 강물은 흐름을 멈추고 모든 생명과 존재의 기쁨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생명의 본질은 본래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하는데 있다. 따라서 세월의 흐름은 생명을 소멸시키는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한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환희를 안겨주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구태여 여름이라는 계절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고, 여름이 가는 것을 그렇게 애달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흐르는 시간의 강물은 꽃다운 젊은 얼굴을 주름지게 하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에 어느 덧 하얀 서리가 내리게 하며, 우리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덧없이 변화시키며 빼앗아 가고 만다.

이렇게 변화하는 만상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적막한 세계에서 영원불멸의 가치를 묵상하며,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물결 속에 발을 담그는 것을 거부하고 그 평안에 안주하여 언제까지나 깨어날 줄 모른다.

자기 마음속에 높고 두터운 담벼락을 쌓고 안으로 칩거(蟄居)해 버린 사람들이 정신적인 영원불멸을 향유하며 바깥으로 향한 마음의 창문을 걸어 잠글 때 그들의 마음 속 뜨락에는 심리적인 계절의 순환도 멈춰버린다. 영원불멸이란 시간의 흐름과 순환이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3. 봄바람

그래서 봄이 찾아와 천지가 온갖 꽃에 뒤덮이고 활짝 핀 꽃잎 사이로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그 향기를 온 세상 가득 흩뿌릴 때도 그들의 높은 뜨락엔 아직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은 채 적막 속에 잠겨 있다.

봄은 그들의 성(城)안에서도 꽃망울이 터트리고 싶으나 봄을 맞이할‘파랑새’는 그들의 너무나 높은 담벼락 때문에 날아들어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으니 그들은 새싹이 돋지 않는 자신들의 뜨락과 함께 아직 더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동화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디선가 늠름한 왕자님이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타나 굳게 닫힌 성문 활짝 얼어 젖히고 상큼한 봄바람을 그들의 얼어붙은 심장 깊숙이 불어넣어 그들의 깊은 잠을 깨우련만...

그런데 그 높은 성문을 열어 젖혀 줄 동화 속의 왕자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은 언제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인가. 어느 날에나 그들은, 자기 가슴을 스스로 가르며 싹을 내미는 한 알의 씨앗처럼 그들 스스로 굳어진 마음을 열어 젖히고, 생명의 환희와 아픔을 안겨주는 이 세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겠는가?

그러고 보면 저 들꽃들은 얼마나 순수하게 제철을 따라 피고 지는가! 스스로를 꽃 피우고 나면 곧 사그라질 자신들의 운명에 기꺼이 순응하면서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산화(散華)하는 것이다.
그렇게 피워낸 꽃 봉우리들이기 때문에 저 들의 야생화는 그토록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것이리라.

4. 아름다운 열매

가을은 진정 우리가 작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모든 것이 조락(凋落)하는 이 가을이야말로 그러한 우리의 결단을 부추기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계절이 아닐까?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그래서 김현승 시인은 위와 같이 이 가을에 여름날의 긴 방황을 청산하고 오직 한 사람을 택하여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과감하게 작별을 고할 용기를 냈는지 모른다. 그분도 끝없는 폭염과 아직 낮이 밤보다 더 길었던 유혹의 계절 여름에는 그런 고독한 결별을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애틋한 사랑이 예비되어 있다해도 세상과 홀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여성, 혹은 모든 남성을 사랑할 순 없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을 택하여 그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하여야 한다. 그로 인해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외 다른 사람과 다른 운명에 대한 일체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머리 속을 유린하는 다른 숱한 사람들과 우리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 자신이 사모하는 연인의 모습을 가슴 속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혼자인 채, 그리고 그 어떤 운명으로부터도 소외된 채 황량한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을 깨끗이 포기한다는 고독한 자기 결단과 선택의 결과이다. 따라서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며 단 한 사람이라도 뼛속 깊이까지 사랑한 사람은 전 인류,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자신이 한 번 잡은 일에 젖먹던 힘까지 다 바쳐 헌신하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가을이 조락(凋落)과 상실의 계절이라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머리 속을 맴돌며 어떠한 선택도 못하도록 가로막는 화려한 환상으로부터의‘조락’이어야 하며 그 헛된 기억에 대한‘상실’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기꺼이 꽃피움으로서 사그라져 가는 들꽃들이 그로 말미암아 겨울을 지새울 씨앗을 맺듯이 당신도 인생의 겨울을 이겨낼 꽃을 피워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생명을 활짝 꽃피운 대가로 당신은 이 땅에서 곧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를 결실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원한 푸르름을 벗고 버리고
붉은 아픔으로 꽃피어 지는 것은,
산화함으로써 열매를 맺으며
씨앗을 맺음으로써 새 봄의 새싹으로
다시 돋아날 수 있음을
가을이 제게 말없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5. 이제는 이곳에, 이들과 함께

이제 우리는 이 땅에 확고하게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이 땅의 현실로부터 눈을 감게 했던 온갖 잡다한 것들의 잔상(殘像)을 쫓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젖과 꿀이 흐르는’비옥한 땅에 대한 환상들이 무시로 우리의 뇌리를 침범하여 이 유한한 땅에 대한 사랑을 한 순간에, 자취 없이 앗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연인의 얼굴을 가슴깊이 각인 한 후 타인에 대한 영상을 뇌리에서 지워감으로써 사랑을 지켜 나가듯이 우리도 그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결별함으로써, 그 희생의 대가로 이 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그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생명을 얻을 때 우리는 조물주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구속시킴으로써 세상을 창조했다는 유대인들의 천지창조 신화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은 유한하며 곧 소멸하고 마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고유한 본질이며 우리 또한 예외 없이 생명체가 지니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이라는 고유한 본질을 받아서 지니고 있다.

생명의 본질이 이러하기에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사람일수록 유한한 이 세상과 그 한계에 스스로를 가장 잘 구속시키고 생명체의 고유한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해 나간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이 장소 그리고 자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함으로써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도박사들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하며 모험을 즐기지만 그들의 삶은 언제나 실패와 절망으로 낙찰되고 만다. 반면 자기가 사는 곳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배팅함으로써 생명 자체의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새벽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돋보이며, 자기가 살지 않은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까지 그 찬란한 생명 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게 됨으로써 이 세상 어느 곳 어느 시대든 그를 그리는 사람들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가을의 기도

김 현 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덧붙이는 글 가을의 기도

김 현 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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