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사시오!" 우리 동네에 나타난 함진아비를 보고

과연 함은 누구를 위한 풍속인가?

등록 2000.10.18 11:10수정 2000.10.1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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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사시오! 함 사시오!"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장정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인 듯 온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어 장정들의 고함소리에 힘을 보태 준다. 원미동 어느 골목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오늘날 혼례 풍속의 하나인 함을 파는 모습이다.


얼굴에 오징어 가면을 쓴 말이 함을 둘러메고 그 옆에 말을 부리는 마부가 있고 그 옆으로 두 남자가 청사초롱을 들어 말과 마부의 길을 안내한다. 함진아비들은 신부 집에서 5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부터 흥을 돋구기 시작한다. 이렇게 신부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흥을 돋구기 시작하는 것은 신부 집에 함을 최대한 비싸게 팔기 위한 전략이다.

함을 둘러멘 말이 집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것은 오로지 신부 집의 함진아비들에 대한 대접에 따라 그 속도가 달라진다. 대접이 융성하면 그 만큼 빨리 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말과 마부가 길바닥에 주저 앉아 버리기도 한다.

장정들의 목소리가 온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끌자 그때야 신부댁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신부댁의 한 어르신과 신부 친구가 간단한 술상을 준비해서 함진아비들 앞으로 온다. 그들은 대접을 잘해 줄 테니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한다. 그런데 함진아비들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함진아비들에게 막걸리와 맥주가 한잔씩 들어가면서 함 파는 광경은 한층 흥을 더한다.

급기야 신부 친구의 미인계가 펼쳐진다. 함진아비들 앞에서 즉석으로 '소양강 처녀' 한 자락을 뽑아댄다. 아직 미혼인 신부친구 때문에 함진아비들 중에서 총각들이 갑자기 신부 댁의 편을 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신부친구에게 딴마음을 먹은 듯하다. 이렇게 함진아비들과 신부댁의 실랑이가 계속되는데 함진아비들을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돈봉투다. 신부 댁에서 미리 배려한 돈봉투들이 길 위에 놓이면 말이 이 돈봉투를 밟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번엔 돈봉투가 놓여지는 간격 때문에 함진아비들과 신부 댁의 실랑이가 시작된다. 말 한발자국으로 도저히 닿지 않는다며 함진아비들이 불평을 해댄다. 도저히 보다 보다 못한 예비 장모님이 나선다. 들어가면 융성하게 대접해 주겠다며 힘으로 함진아비들을 밀어 붙인다. 떠밀리지 않으려는 함진아비들과 최대한 집 가까이 끌고 갈려는 신부 댁 사이에 약간의 몸싸움이 있고 나서야 드디어 함진아비들이 신부 댁 대문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함진아비들의 함값 흥정은 본 게임에 들어간다. 대문까지 몇 발자국 남지 않았기에 남은 몇 걸음 사이에 목표했던 함값을 달성하려면 이때부터 신부 댁과 흥정을 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심한 경우 함진아비들과 신부 댁 사람들간에 다툼이 있다고도 하는데 다행히 기자가 보았던 이날의 함 파는 행사는 별 무리 없이 끝났다. 심한 몸싸움도 없었고 말다툼도 없었다. 다만 동네를 한바탕 즐겁게 해주는 행사로 끝이 났다.

전통혼례는 서로의 혼인을 타진하고 허락하는 ‘의혼’, 혼약이 이루어져 연길을 청하는 ‘납채’, 결혼식 전날 신부용 혼수와 혼서 및 물목을 넣은 함을 보내는 ‘납폐’, 신부 댁에서 본 혼례식이 치러지는 ‘친영’의 순으로 진행된다. 함은 전통혼례에 있어 바로 납폐에 속하는 것이다. 좀더 살펴보면 함의 유래는 이렇다.

전통예법에 따르면 ‘자고로 선비는 예로써 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여자 선비(여사)규수를 움직이게 하려면 예물을 올려야 한다. 이 예법에 따라 청혼을 하면 남자측에서 여자측에 매우 정중하게 예물을 보낸다. 납폐(納幣)라 함은 이것을 칭한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남존여비의 우리네 전통사상에서 볼 때 의외의 사실이다. 여자 규수를 선비로 대한다는 것이다. 곧 이 말은 설령 혼인을 하고 남자집안의 여인이 되어 한 많은 여인네의 삶을 살게 될지라도 적어도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에서는 최상의 존중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이란 아니 정확히 납폐란 그 존중의 예를 보여주는 일인 것이다.


오늘날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 집으로 함을 들고 몰려가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쇼를 하는 것은 이 납폐가 현대식으로 변한 것이다. 예전에도 당연히 신랑 친구들이 함을 들고 신부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요즘 만큼 실랑이를 크게 벌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기자가 부모님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돈봉투를 놓는 풍경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후한 대접이라고 해봐야 잘 차린 술상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런 행사가 있고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의 경사를 알게 되는 등 이후 상부상조를 위한 알림의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함 풍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은 과한 면이 있다. 함의 본 뜻은 아는 이가 없고 오로지 함값을 많이 받아내려는 풍경들이 벌어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또한 지나친 실랑이가 혼주나 신랑 신부 당사자들에게 혼례를 짜증나는 과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더불어 다른 문제도 파생시킨다. 함진아비들이 함 값으로 수 십만원을 챙기게 되면 그 중의 일부분은 혼례식 날 꽃값으로 신부측에 다시 돌아가지만 문제는 남은 돈이 함진아비들의 음주가무에 쓰인다는 것이다.

아마 삼사십대의 남성들은 다들 한번씩 경험이 있겠지만 수십 만원의 함 값으로 가는 술집이란 결국 단란주점이나 룸싸롱으로 통일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본 기자의 기억으로도 그렇다. 이런 술자리들이 친구들간의 우정을 돈독히 해주고 신랑 신부의 뜻 깊은 혼례를 축하하는 의미도 있다지만 그건 과한 해석이고 이는 당연히 지양해야 할 우리의 신풍속도인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풍속도 변하고 예도 변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당연한 사회섭리다. 그 변화는 대개는 시대에 맞추어 그 시대에 맞게 변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분명 그 풍속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또한 그 풍속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진중한 모습들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물 흘러 가듯 남들이 하는 풍속을 그냥 따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알맹이는 없고 왁자지껄한 껍데기뿐인 그래서 왜 그런 것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릴 것이다.

오늘부터 함을 팔러 가는 함진아비들은 함의 의미가 선비인 신랑이 규수(여자선비)에게 예를 올리는 행사임을 한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yhome.shinbiro.com/~fhu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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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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