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이 낳은 시대의 선각자 '안재홍 선생'

해방정국 혼란시 독창적인 '다사리 민주주의' 제시

등록 2000.10.21 11:02수정 2000.10.2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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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 (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또 정치가로 활동한 평택이 낳은 선각자이다.

특히 그의 신민주주의, 다사리 민주주의는 한국 근현대사의 큰 봉우리로 꼽히지만 6·25 때 납북된 후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을 맞아 민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해 본다.

민세의 생애

민세는 1891년 12월 30일 당시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에서 중농가 양반 안윤섭(순흥안씨)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서 수학한 뒤, 21세 때인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진학하였다.

1914년 대학을 마치고 귀국한 민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과 황성YMCA 교육부 간사를 거쳐, 대한청년외교단 총무로 일하던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과 국내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때 받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척추를 다쳐 평생 허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후 1924년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기자 겸 주필, 발행인, 사장으로 10여년간 재직하였다. 또 1927년에는 신간회 간사로도 활약했는데, 신간회 활동과 일본군의 산동출병을 비판한 사설 등으로 30년대 초반까지 4차례의 옥고를 치루었다.

41세 때인 1931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만주동포를 위한 의연금 일부를 유용했다는 혐의로 투옥(5차)되면서 1년만에 사임했다. 조선일보 재직시 사설 980편, 시평 470편 가량을 게재했다.


이 시기 민세는 한국고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채호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했으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를 정인보와 함께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3차례(6, 7, 8차)의 옥고를 치룬 후, 고향인 평택으로 귀향하였으나 조선어학회 후원 혐의로 9차 투옥되어 흥남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민세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좌파가 주도하는 건준을 탈퇴 좌우세력을 망라하면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였으나, 1947년 미 군정청 민정장관에 취임하면서 한국독립당과 갈라서게 된다.


5.10 제헌의회 선거시 자유총선거가 가능한 남쪽지역 만이라도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1950년 5월 30일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시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그러나 며칠 뒤 6·25가 발발하였고, 그 해 9월 중순 납북된 뒤 1965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홍명희를 대표로 장례를 치뤘으며, 1989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고,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헌되었다.

민세는 누구인가?

민세는 선비적 기품과 고매한 인격으로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현실에서 지도자의 참모습을 몸소 실천한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다.

첫째,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독립운동가

민세는 일제하에서 9번에 걸쳐 7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민족적 양심을 잃지 않고 지켜온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0년대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와 타협하자 좌우합작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고, 벽초 홍명희, 만해 한용운 등과 비타협 투쟁에 앞장섰다.

둘째, 근현대 언론사에 큰 획 그은 언론인

민세는 일제하에서 '시대일보'를 시작으로 '조선일보'주필과 이사를 거쳐 사장에 이르는 동안 조선일보의 기틀을 다진 언론인이다. 사회 과학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수백편의 사설을 통해 민중계몽에 앞장섰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루었다. 일제 '고등경찰요사'에는 민세의 경북상주 강연을 인용하면서 "논봉이 예리하고 조선통치의 근본을 찌르고 있다"고 평했다. 해방 후에는 '한성일보' 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셋째, 민족주의 사학자

1930년 '조선 상고사관견'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후, 1934년 조선학 운동을 주창하면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민세는 일제 식민지 사관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가 왜곡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고,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선생과의 교류 속에 '신민족주의 역사학'이라는 독창적인 한국 고대사 이론을 전개한다. 이 결실로 '조선 상고사감'을 완성하였다.
특히 오늘날 고조선 사회의 이해는 민세의 연구를 기초로 한다.


민세의 사상

'다사리 민주주의'와 남북통일

한국 현대정치사와 이데올로기적 냉전에 비판적 시각에서 해방직후기에 활동했던 민족진영의 정치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민세는 '다사리 민주주의'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하여 당시의 심각했던 좌우대립과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다사리'는 '다 사리어' 즉 '다 말하게 한다'는 만민총언의 가치와 '다 살리어' 즉 '다 골고루 잘 살게 한다'는 대중공생의 가치를 동시에 포함한 보편적 정치이념이며 이러한 다사리 이념은 고조선 시대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삼국시대에는 제가평의(고구려), 정사암(백제), 화백(신라)이라는 정치적 제도를 통해 실천되어 왔다.

6·15 남북 최고위급 회담으로 반세기 분단의 벽을 허물고 있는 시점에서 공존 공생을 주창한 민세의 '다사리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자료- 다사리 제2호'다사리 민주주의와 미래 한국'구범모,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집 홍보자료 '민세 안재홍 선생은 누구인가' 강원룡, 민세 안재홍 선생 35주기 추도식 자료집, '광복의 역사인물'1999년 연합뉴스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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