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삶, 사랑, 그리고 시

등록 2000.10.24 18:40수정 2000.10.2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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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그리고 시...

- 정호승 시인을 만나.


감수성이 예민하던 고등학교 시절,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라는 시집으로 나는 처음 그를 만났다. 터질 듯한 심장은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낮밤 없이 헤매다니던 그 힘들었던 시간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연어...' 내 늦은 새벽을 함께 위로해 주었던 바로 그 시의 창작자를 만난다는 설레임에 나의 가슴은 두근대고 있었다.

교대에 있는 현대문학북스라는 출판사를 찾아 시인을 만났다. '어서 와요'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시인의 실제 얼굴은 시집에서만 보던 날카로운 사진의 외모와는 달리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원한 차를 대접받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시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던 시인은?(외국, 내국)

"모든 시인이 나의 스승이지... 늘 다른 이들의 시에서 배우는 거니까, 그래도 꼽으라면 1970년 당시 민음사에서 나온 외국 시인들의 시를 교양으로 많이 읽었었고, 1930~부터 현재까지의 시인들 중에 서정주, 김현승, 윤동주, 김수영 시인을 생각해."

- 다른 유희적 기제들의 범람으로 점점 그 설 곳을 잃고 있는 문학-시-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며 시의 존재 가치와 효용성들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늘 봄이 와서 꽃은 피는 것'이지, 그리고 그 꽃은 늘 인간은 즐겁게 하지. 인간은 눈물을 흘리는, 육체로만 되어 있지 않고 영혼과 함께 있는 존재이지. 그런 인간의 영혼의 서정이라는 부분을 채우는 것이 바로 시이고, 시대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 없이 변해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늘 필요한 것이고, 그런 역할을 바로 시가 맡아줄 수 있는 부분이고, 사회가 아무리 각박해진다고 해도, 인간이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는 서정의 세계는 다른 예술의 형태와 더불어 인간의 본질과 함께 인간에게 늘 남아있는 거지, 시의 효용성은 사회가 메말라가고 인간성이 약해짐에 따라 그 의미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대표시를 꼽는다면?


"계속 시를 쓰고 있기에 아직 나의 대표시를 말하려면 아직 어렵고, 시집은 첫사랑처럼 첫번째 시집을 아끼고, 개인적으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97, 창작과 비평사)'를 가장 아끼지, 죽어서 가져가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바로 그 시집이고. 그 중에서 '그리운 부석사'의 시를 좋아하고 있어. (그리운 부석사는 바로 이 시집의 제목인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의 구절을 담고 있는 시이다.)"

- 다른 작가의 좋아하는 시나 시집은?

"하나를 꼽으라면 어렵고 딱히 말하자면 박형준, 함민복 시인의 시를 좋아해."

- 현재 많은 젊은 시인들 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쏟고 있거나, 마음에 드는 시인은?

"요즘 많은 활동 중인 나희덕,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시가 좋아, 젊은 나이에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삶을 깊게 통찰하고 있어."

- 시인이 가져야 할 재능, 품성 같은 것은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

"다른 이들은 시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재능을 타고 태어나지. 어떤 일에서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시인의 자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생각을 해, 그 위에 재능이 있다면 좋은 것이겠고, 시 또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책들 -모든 문학-을 많이 읽고 시에 대한 공부-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3多)-가 바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비결이고...(그럼 천부적인 재능은 중요하다고 보지 않으시나요?) 그런 재능이 있으면 물론 좋지만, 그것이 하는 역할은 노력만큼 크진 않지."

- 이제 갓 시를 사랑하기 시작한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의 젊은 시인들에게 조언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까도 말했지만, 시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노력하는 것. 무슨 일이든 노력하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

- 시 세계가 대중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사회적 상황들도 많이 바뀌고 나이도 들고...(웃음) 그렇지만 시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적인 완결성이겠지."

- 오랫동안 창작을 해오셨는데, 그런 창작의 영감들은 언제, 어떤 때 주로 찾고 계시나요?

"사람들이 흔히 시는 영감을 받아 그것만으로 쓰는 것이라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시는 그런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이지. 시인에게는 그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는 눈들이 필요한 것이겠고... 시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각들이 필요한 것이지 (여기서 시인은 무지개떡 안에 무지개를 생각하는 발상과, 네모난 수박을 이야기하며 환골 탈태를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둥근 수박의 비유를 들었다.)"

- 시를 주로 쓰시는 시간은?

"시를 틈틈이 쓰는 것은 아니고, 시적인 메모들을 꾸준히 해오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써."

- 좋은 시를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을 알면 늘 좋은 시를 쓰겠지.(웃음), 시가 되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시의 형태는 있으되, 우선 산문으로 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봐. 시적인 형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시라고 볼 수 있겠지. 다른 이들도 함께 공감하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생각해."

- 시집 뒤에 붙이는 시의 해석을 붙이는 평론 같은 것은 어떤 것인가요?

"출판하기 전의 관행 같은 것이고, 주로 지인(知人)들이 많이 써주지, 그리고 주로 글 안에서는 칭찬을 많이 하는 편이지...(웃음)"

- 자신의 시의 시적인 해석의 다양성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인으로써 일단 시가 내 손을 떠나면 어떻게 해석이 되든지, 그건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시는 늘 다양한 면에서 해석이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러한 평론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고, 옥석을 가려주는 것이니까."

- 선생님 시에서 등장하는 잠언체의 어투를 자주 쓰시는 이유는?

"시적인 전달력이 있고, 시적인 호소들을 위한 거지..."

- 시집의 제목인 도발적인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말은?

"내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그 말은 어느 불가의 스님이 말씀하신 거야, 불교에선 그 말이 하나의 화두와도 같이 쓰이곤 하는 말이지."

- 다음 시집은 어떤 것들을 소재로 쓰실 계획인가요?

"결국은 우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목에 관한 관심들, 인생 하나 하나의 편린들을 소재로 쓸 것 같아. 꾸준히 계속 마음 속으로 쓰고 있고...


시인의 삶, 생각들...

- 마지막 시집을 내신 뒤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은요?

"지금은 현대 문학 북스라는 출판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지. 마음속으로는 틈틈히 늘 시를 생각하고 쓰고 있고, 거의 10년 만에 다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 그 계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었고, 고 3때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고교 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경희대에 문예 장학생으로 들어갔는데, 집안의 가난한 사정 때문에 서울에 있는 경희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썼었지."

- 시가 주로 삶 전체를 관망하는,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초기의 시를 썼던 70~80년대에는 암울했던 사회, 시대적 상황들이(시대적 눈물) 나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시를 쓰게끔 만들었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우리가 그러한 시대적 문제에 관해 떠나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 인간의 생에 관한 생각들로 시적 관심이 변했지."

- 살아가시면서 화두가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글쎄... 어려운데, '인간이 무엇인가' 결국은 그런 문제인데, 결국은 사랑의 문제이지. 사랑의 문제에서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큰 범위 안에서의 사랑의 문제가 결국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지. 인간이 삶 속에서 고통 받는 대개의 이유도 사랑이고..."

- 에세이집을 보면 릴케의 글을 빌어, 사랑의 형태에 신념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에도 그 신념의 사랑을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지, 감정은 구름처럼 변하는 것, 사랑도 신념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약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이니까. 이성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그런 인간의 마음들은 변하는 게 정상이고, 사랑의 감정은 쉽게 사라질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은 신념화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거지."

- 글에서 접한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암울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다'라는 생각을 해. 천주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 친한 시인들은요?

"내 나이 또래의 문인들하고 친하게 지내, 나팔꽃이라는 시인들의 모임이 있고, 안도현, 도종환, 이동순, 최승호의 시인들. 그리고 경희대 국문과 후배들의 많은 문인들하고 친해."

- 어떤 책들을 주로 읽으세요?

"잡독을 하지, 작은 신문 한 귀퉁이의 기사에서부터 잡지까지...(웃음)"

-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맡고 있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속 시를 써야지...(웃음)"


그리고...

시를 쓰며 그 안에서 삶의 위로를 얻는다고 말하는 시인, 시를 쓸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평범한 웃음을 짓는 사람. 삶의 고통, 어려움 등이 그가 좋아하는 시속에 용해되고, 각자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것을 좋아하듯 나도 평범하게 시를 좋아하는 것일 뿐... 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시를 '주무르고' 있을 때 비로소 고된 삶을 잊고 잠시나마 즐겁다고 말하는 시인... 정호승 시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본 정호승 시인은...

사랑, 별, 외로움, 가난, 슬픔 그리고 기쁨...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들은 하나같이 전형적인 '시'적인 시어들이다. 그는 이런 서정적인 '시어'들로 '사랑'을 노래하는 '가장' 서정적인 시, 시나브로 가슴에 고요한 '울림'을 던져주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예전에 그러한 그의 시를 보며 그에게 바로 우리 시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서정의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 '서정시인'(?)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그가 제 3회 소월 문학상, 그리고 이번에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영국에는 하이네, 독일에는 괴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의 울타리에 갇힌 세계에서만 그를 만나다 직접 그를 보면서 솔직히 나 스스로 시인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다. 그리고 잠시 어지러웠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절에 꿈꾸었던 시인에 대한 공상이 너무 컸었던 걸까... 그의 모습은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빙그레 미소 지으며 '시인도 참 평범하지...?' 하고 말하는 그의 선한 웃음을 바라보며 슬며시 나의 기억 어디에선 가 잊고 있던 또 한가지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말했듯 사람은 못난 사람, 잘난 사람들이 따로 있는게 아니며, 시인이라 해서 특별히 대단한 것이 아니라, 시인도 마찬가지의 생각으로 누구나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말... 그리고 하나의 개체인 사람은 더 옳은 삶도, 더 그른 삶도 없이 자신의 주어진 생을 걸어가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어 속에 갇힌 '보편적' 존재라는 그 사실 말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시에 대해 거짓된 수사를 붙이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생각은 대화 중의 자그만 깨달음과 함께 사라지고... 그럴게다. 나와 같은 우둔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깨우쳐 주려 시인은 내 인식 안의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게다. 그렇게 삶의 긴 여정 가운데, 내딛는 기나긴 발걸음마다 '시를 내는' 그 '평범한 사람'의 삶과 사랑, 그리고 시는 계속 이어져 갈 거라는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삶,사랑, 그리고 시...'의 첫 글을 접는다.

덧붙이는 글 | * 다음 기회엔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위의 기사는 인문, 문화, 예술 웹진 '미인'(www.meinzine.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회엔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위의 기사는 인문, 문화, 예술 웹진 '미인'(www.meinzine.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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