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길
지하철 5호선 청구역은 공사하느라 무척 어수선하고 쇳내가 코를 찌릅니다. 지하철 6호선 뚫리는 날이 미뤄지고 또 미뤄지면서 이제야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지요. 신당동에 있는 <헌책백화점>은 청구초등학교 옆에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백화점'치고는 콩알만하다고 하겠지만 크기만 크다고 백화점입디까. `온갖 것이 다 있다'는 데서도 `백화점'이라고 하지요. <헌책백화점> 또한 `온갖 책이 다 있다'는 데서 `헌책백화점'입니다.
이미 스무 해 앞서부터 `백화점'이란 말을 책방이름에 내걸었답니다. 우리 책 문화와 현실이 `전문 헌책방'이 들어서기 힘든 만큼 - 스무 해 앞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 일찌감치 `백화점 헌책방'을 생각하고 꾸려온 일은 슬기롭다고도 볼 수 있지요.
저는 5호선 서대문역 뒤에 살고 있어서 이곳으로 갈 때면 5호선만 타면 십 분 안에 닿습니다. 앞으로 6호선이 뚫리면 신촌이나 연신내, 고대쪽에선 이 녀석을 타고다니면 좋겠지요. 언젠가 금호동에 있는 헌책방 <고구마>에서 154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동국대 - 동대문운동장 - 종로통을 지나가며 된통 막히면서 한 시간도 넘게 걸렸던 일을 떠올리니 감히 이곳 <헌책백화점>엔 버스 타고 가 보시라는 말을 하기 힘듭니다.
다니는 버스는 1,11,38-2,154,211 이렇게 있는데 종로나 동대문운동장 즈음에서 버스를 타면 몰라도 서대문, 독립문, 홍제동, 연신내 쪽에서 이 버스를 탄다면... 뒷일은 책임지지 못합니다.
지하철 5호선을 타고오는 분은 2번 나들목으로 나와서 짧은 건널목 하나 건넌 뒤 그 길 따라 곧장 5분 즈음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왼편에 청구초등학교가 뵈고 청구초등학교 앞 20미터 즈음에서 <헌책백화점>을 만납니다. 이곳 앞은 거님길 폭이 넓어 자가용을 끌고와도 대놓을 수 있겠더군요.
처음 가서 만난 책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이야 오늘 봤다가도 내일 나가고 내일 보았는데도 몇 해가 가도록 그대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른 책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흑인문학전집, 휘문출판사(1965) 1권> <이상권-딸꼬마이, 산하(1991)> <풀잎동인 시모음-우리 사랑 그윽한 곳, 알돌기획(1988)> <이주홍-못나도 울엄마, 창비(1990개정)> <김수정-미스터 제로, 서울문화사(1990)> <일하는 청년의 세계, 인간사(1984)>.
김수정 씨 만화 <미스터 제로>를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하지만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대목이나, 이곳 언저리에 학생들이 많이 나다닌다는 대목을 떠올리면 쏠쏠한 만화책을 알뜰히 건질 수도 있습니다. 크기는 작은 헌책방이지만 어린이책을 채운 책장이 일반책을 꽂은 책장 가운데 1/4이나 된다는 대목도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이책이 흘러나오고, 초등학교 옆에서 곧바로 책을 받기에 질높은 어린이책을 퍽 많이 만날 수 있겠더군요.
<흑인문학전집>은 여러 권이지만 어제 찾아갔을 땐 1권 하나, 2권 둘 있더군요. <니이체 전집>이나 <앙드레 지드 전집> 같이 휘문출판사에서 스물-서른 해 앞서 펴낸 전집들이 임자를 기다리고 있군요. 모두 세로쓰기이긴 하지만 번역은 꼼꼼히 잘해놓은 책들이기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로쓰기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풀잎동인'이란 `날 적부터 장애인'과 `난 뒤 사고입은 장애인'이 모인 문학모임입니다. 이 문학동인 가운데는 <산골소녀 옥진이>도 있군요. 이들 가운데 `산골소녀 옥진이'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지요. 헌책방을 다니노라면 `산골소녀 옥진이' 시모음을 어디서나 만납니다.
노후생활을 대주는 책방살림
<헌책백화점>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더군요. 자녀들 모두 대학교 졸업시키고 지금 꾸리는 가게도 셋집에서 `자기 가게'로 바꾸었기에 셋값 걱정 없고 아이들 학비나 살림돈 걱정이 없답니다. 그래서 다른 헌책방처럼 "셋값 대느라 뼈빠지게 일할 걱정"이 없어서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답니다.
당신들은 "그저 없는 듯(존재 자체가 없는 듯) 살아가"는 게 철학입니다. 아주머닌 "뭐 잘난 것도 없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판을 치고 "바깥에 자기를 드러내려" 애를 쓰는데 그런 모습들이 달갑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재고만 다루는 책방들은 헌책방이라 할 수 없"다면서 "적어도 50년대 60년대 70년대 책들을 갖다 놓고 있어야 뭔가 헌책방이라 할 수 있"답니다. 새책방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책들을 값싸게 갖다 놓기만 해서는 `헌책방'이 제대로 `헌책방 구실'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헌책방은 도서관과 새책방과는 다른 구석이 있지요. 갓 나온 책을 싸게 사려고 찾아가는 곳이 헌책방이 아닙니다. 새책방에서는 찾을 수 없고, 도서관에서는 원자료가 많이 다치거나 가위질된 것들, 그리고 개인이 가지고(소장하고) 찾아보고 연구할 책들을 찾으러 오는 곳이죠. 이런 대목을 곧게 이어가면서 제가끔 들어오는 재고책도 다루고 다 본 책이라고 파는 요즈음 책들을 받아서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을 마주해서 파는 일을 해야 제대로 된 헌책방이란 얘깁니다. 또 그래야 새책방도 살고 도서관도 살고 헌책방도 살 뿐더러 좋은 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도 살지요.
심혈 기울이는 책을 만나고 싶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다 옛날 책들 짜깁기한 것들이지, 책다운 책도 80년대로 내려가야 있어요"
80년대까지 나온 책들은 책을 만든 사람들이 `피땀 흘리고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책을 너무 쉽게 만들어서 엉터리가 많답니다. 책을 파는 사람 입에서조차 나오는 "책이 엉터리다"는 얘기. 그러나 이런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돈벌이 연모'로 책을 가볍고 쓸모없게 펴내는 사람들.
"50년대에 나온 책들 있죠? 지금 보면 책장이 부서지잖아요. 요즘 나오는 책들이 오래 가 봐야 몇 해나 갈 거 같아요. 한지로 만든 책은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잖아요"
아저씨 말을 듣다 보니 참말로 "한 번 보고 버리는 책"을 만드느라 나무를 엄청나게 베고 `제지'한다며 써대는 엄청난 물로 더럽혀지는 환경이 떠오릅니다. 열 해쯤 지나면 벌써 누렇게 빛바라고 스무 해 지나면 종이가 부슬부슬해지고 서른 해가 지나면 부서지려고 하는 책들. 이렇게 `한 번 보고 버려지도록 만든 책'들.
헌책방은 "한 번 보고 버리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찾아보는 책들"을 갖추고 "한결같이 찾아보는 책"을 찾는 책손님을 마주하는 곳입니다. 더불어 "돈벌이"가 될 만한 책들을 앞에 잘 보이게 내놓고 이런 책들만 유통시키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 뜻깊고 찾을모가 있는 책"들을 골고루 가지런히 잘 갈무리해놓고 책손님을 기다리는 곳이죠. 헌책방에서도 `잘 나간다'고 해서 앞에 드러내놓지 않습니다. `안 팔린다'고 구석에 처박아두지도 않고요. 모두 똑같은 책이고 이런 책들을 소중히 여길 사람을 기다리지요.
그래서 헌책방에서 책을 찾아보기 힘들단 얘길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보려는 사람이 손쉽게 골라내서 손쉽게 읽고 버리도록 하지 않거든요. 지긋이 책을 고르고 지긋하게 책을 살펴서 지긋하게 자기 몸과 마음에 곰삭여 자신이 고르고 살핀 책으로 얻은 슬기와 물미를 지긋하게 자기가 살고 일하는 누리에 펼치도록 이끄니까요. 지긋한 마음을 갖고 책을 두루 살피고 "책이 제 빛을 내도록 찾아내는 일"을 하라는 곳이 헌책방이니까요.
명함은 아무나 안 주는데
책방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사진은 뭐하러 찍느냐고, 사진 같은 걸 찍어서 남기는 일도 마뜩찮다고 하십니다. 그래, 헌책방 사진도 열 해쯤 찍고 앞으로도 줄기차게 찍으면 헌책방이 달라져가는 모습이나 역사를 조촐히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니, "그럼 사진도 찍을 만하네" 그러십니다.
겨우 허락을 얻고 사진을 한두 장씩 찍으며 아저씨가 책사러 나가실 때까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한 주에 한 번씩은 찾아오면 늘 책을 사두고 찾는 사람들 얘기듣고 빼두기도 하니까 좋은 자료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몇 번씩 하시네요.
저는 집도 가까우니 틈틈이 갈 생각입니다. 틈틈이 찾아가며 "책을 맞이해야"지 제가 갈 때마다 "책아, 나오너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청구역 헌책백화점 02) 2252-3554
* <헌책백화점>에서 찍은 사진은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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