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최명희 묘에 비석이 세워졌네

전주 '혼불문학공원' 오는 11일 준공앞두고 마무리 한창

등록 2000.12.09 20:10수정 2000.12.11 10:3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단 한사람 만이라도 오래 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보셨으면 좋겠다"하던 작가 최명희가 세상을 떠난 지 두 해가 되었다.


최명희 찾기에 두 해를 이곳 저곳으로 신들린 듯 달리던 내 걸음이 멎은 지 두 달이 되었다.

EBS방송에서 뜨고 있는 말총머리 김홍경 씨의 가르침에 비추어 너무 한쪽에 집념하면 병이 된다. 길을 가면서도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혼불 작가 최명희의 세상에 숨어있는 글을 찾으려 헤매다닌다만 어찌 정상이라 하랴.

세상에 남은 그이의 유작을 찾아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동갑내기 내 뜻이 어느 방향에서 여기 <오마이뉴스>에 올린 최명희와 관련한 글의 전부를 지워 달라는 통보가 왔을 때, 이제 눈거풀을 손으로 누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나는 어떠했던가.

60회를 올렸던 글 중에서 절반 가량을 삭제하고 나는 최명희에게서 벗어난 자유만세를 불렀다.

한길사에서 뽑은 독후감을 쓴 독자들의 글을 보고 그 간절함을 내것과 비교하면 나의 것에서는 풋내가 얼마나 물씬대던지.


"이제 당신에게는 혼불을 사랑하는 지극 정성의 독자들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는 앞장 서서 외쳤던 자리에서 떠납니다."

그 참에 최명희와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고 최명희의 모교인 기전여고 교감이신 김환생 교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KBS에서 학교를 왔었습니다. 최명희씨 2주기를 맞이해서 일요스페셜로 최명희 특집을 다룬답니다. 협조 요청이 와서 최명희 씨의 동기 동창과 제자며 은사님들하고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선생님께서 모아 펴낸 글도 보여주었고 연락처도 알려 주었습니다. 연락이 갈 수도 있으니 당황하지 마시고요."
당황할 일이 없었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

열흘전인가.
KBS 전주 라디오 아나운서 김수진이라며 전화가 왔다.
"우리 라디오에서 최명희 선생님 2주기를 맞이하여 2회로 특집 방송을 꾸밀 예정입니다. 자료가 필요하면 전화를 올려도 될까요?"
하길래 나는,
"기전여고 교감선생님께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부탁을 드리면 도움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겁니다"했다.

그 때뿐. 작가 최명희의 2주기가 12월 10일이지만 김수진 아나운서는 내게도 김 선생님에게도 전화가 없다. <오마이뉴스>를 방문해보라고 내가 말은 했었지만 작가 최명희의 글이 다 삭제되고 내 글의 감상이라도 갈무리 해갔는지. 다시 하루 또 하루가 지났다.

전주 MBC에서 이메일이 왔다.

"저희는 전주, 광주, 목포, 여수 공동 제작 프로그램인 '생방송 화제 집중'으로 오는 혼불작가 최 명희님의 추모 2주기를 맞아 작가 최명희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번주 금요일(12월 8일)에 황종원님과 함께 촬영을 했으면 싶은데, 어떠신지요?'

전주MBC 편성제작부의 TV구성작가 한선이라고 했다. "작가의 2주기를 맞이해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하면서 서울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가족을 방문하든지, 기전여고를 방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했지만 전주MBC의 관심은 혼불 작가를 찾아 나섰던 동갑내기의 자취에 관심이 더 많았다. 서울로 온다 했던 MBC 전주팀의 계획 변경으로 내가 12월 8일에 내려가게 되었다.

'최명희 씨를 기리는 일이면야' 하며 아침 6시 전주행 첫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하니 9시가 채 안되었다.

MBC 구성 작가 한선은 작가 최명희의 기전여고 후배이며 생전의 최명희와 대화를 나누고 친절하고 자상했던 선배에 대한 기억을 아끼고 있었다.

담당PD 유영민씨와 한선 작가 앞에다가 내가 챙겨 왔던 자료를 펼쳐 놓았다.

"이것으로 도움이 되었으면..."했지만 내 역할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남원의 혼불 마을과 최명희 문학공원으로 길을 잡아가며 최명희 찾기에 쏟는 독자로서의 한마디씩 짚고 넘어 가라는 것이었다

나도 티브이에서 요즘 흔히 보는 탤런트도 아니면서 실감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되었구나. 쑥스럽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일행의 계획은 이랬다.
혼불 마을의 종가를 방문하여 혼불의 주인공이신 효원 마님을 뵙고 청호 저수지를 돌아보고 전주로 와서 최명희 문학공원을 보자.

전주에서 17번 국도를 쭉 타고 가다가 혼불마을이라는 알림판이 있다. 혼불 마을로 달렸다. 세상은 최명희 띄우기로 방송사 직원들의 걸음이 바쁘건만 마을에는 젊은 이들의 흔적은 지우개로 지워진 듯 없고 낯선 발자국 소리에 동네 개들은 "게 섰거라"하고 호통치자 동네 어른 한 두 분이 객들을 지켜 본다.

"안녕하세요"하며 넉살을 떠니 내 목소리가 마을을 시끄럽게 했나보다. 나는 나와 말을 나누기로한 리포터 서다희씨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보세요. 혼불의 배경이 된 마을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바로 소설의 핵을 아루는 복판에 있습니다. 개울과 논두렁, 밭두렁...

보이는 것이 없나요? 귀하고 귀한 구슬을...안보인다고요? 최명희 선생은 여기 구석 구석에 있는 구슬을 갈고 닦아내고 자신은 실이 되어 구슬 목걸이로서 혼불이 되었습니다"

서슬 푸른 종가의 대문을 들어섰다.
사랑채 어른의 기침 소리와 안방 마님의 기척이며 노비들의 조심성 있는 발자국 소리는 혼불 속에만 가득할 뿐 아무도 없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계십니까? 여보세요?"
내가 목타게 찾는 보람이 있어 안방 문이 손가락 하나 틈 만큼 열리면서 혼불의 주인공 효원(실명은 박증순님이시다) 마님 얼굴이 초췌하시다.

"내가 감기 걸려서..."하며 힘들어 하시는 말투로 보아 인사 말씀 말고는 말씀 듣기를 바라기는 욕심이다. 개인이 돌볼 수 없다면 해당 관청에서라도 돌보아야 하건만.

한 여름 나무그늘 아래에서 넉넉히 보이던 종가의 너른 집은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했다. 사람이 머물지 않은 사랑채 문창호지는 구멍나고 찢긴 채 고향을 지키고 있는 노마님의 가슴같다.

전주MBC 방송국에 다시 갔다. 방송국의 컴퓨터 즐겨찾기에는 <오마이뉴스>가 있었다. 최명희에 대한 내 글이 줄줄이 나오고 방송국의 카메라는 컴퓨터의 모니터의 화면을 잡는다. 기사를 올리는 내 모습과 기사를 찍는 내 손이 크로즈업 된다.

빠른 동작으로 찍으며 솜씨 자랑을 하려 하지만 찍으면 오타고 수정하느라고 헤매고... 그래도, 방송팀들은 "잘 찍으시네요"하며 격려를 해준다.

혼불 최명희 문학 공원은 12월 11일 준공일에 맞춰서 마무리 손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묘지로 가는 길이 숲속에 숨어서 찾을 길이 막막했는데 지금은 길에서 한 눈에 보이도록 덩크 슛하는 농구선수 키만하게 커다란 바위에 <혼불문학공원>이라는 안내 바위가 정답고 반가웠다. 묘지로 가는 길바닥은 나무로 깔아 놓아 산길을 걷는 기분보다도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고향의 길에 들어선 듯 포근했다.

봉분 주위를 정리를 했고, 묘비 없이 썰렁했던 자리에는 단정하고 곱게 비석이 서있다.

"소설가 최 명희의 묘
1947-1998 전주에서 태어난 '혼불'의 작가 여기 고히 잠들다"

묘비 앞에는 스물 쯤 되는 시절의 얼굴 조각이 하늘을 보고 있다. 작업 중이라 얼굴에 가득한 먼지를 나는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세수시키듯 닦아냈다.

제단에 내가 모은 자료 '혼불 최명희 찾기'와 '혼불'을 놓고 혼불을 썼던 같은 몽브랑 만년필을 놓고 지난번 장마 때 황산의 폐수 속에서 나를 구해주었던 혼불 '독후감'을 조용히 읽었다.

<어느 날, 무심하게 틀었던 라디오 방송에서 명희씨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녀자의 글이 오죽 할까 하던 동갑내기 나의 교만은 당신의 '혼불'을 펼쳐보지도 않았던 그 때가 1996년 가을이었던가. 액막이 연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맨 처음 네모난 종이 한 장으로 그렇게 순결하게 태어난 백지는 아무런 죄도 없이 내 손에 반으로 접히고, 또 한번 꺾였습니다. 그 상처와 꺾임을 누구라서 짐작했겠어요." 종이 한 장이 접히고 꺾이는 것이 별 것도 아니다 하면 그뿐 이겠지만 하잘 것 없는 사물에 대한 사랑이 충격이었답니다. 한 번 만날 때를 나 홀로 기약했건만 너무 늦어 혼불되고만 당신의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리니 덧 없어라. 한이 가슴에 맺혀 어찌 풀리겠습니까. 당신의 육신이 잠시 머물고 있었던 병원 영안실을 나와서부터 나는 '혼불'의 시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혼불'은 당신의 '혼불'이요, 나의 '혼불'이며 우리의 '혼불'입니다. 하나의 정인양 굵은 몽브랑 만년필로 '혼불'을 새기면서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습니까. 명희씨. 앞에 술잔 놓였으니 잔 받으세요. 목을 타고 넘어가는 투명하도록 분명한 술의 체온과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당신의 '혼불'이 서로 만나니 너무 행복합니다. >

나는 준비해온 잔에 술을 채워서 작가 최명희에게 올렸다.
그리고 내가 쓴 독후감에 불을 지펴 그이의 혼령에게 띄웠다.
"한여름 풀벌레 소리 가득할 때가 어제인 것 같습니다. 가을은 어디론가 가고 겨울에 서서 명희씨를 보는군요. 당신의 흔적 없이 봉분 하나가 을시년스러웠는데 이제 당신은 자리를 잡았군요.

이런 예우가 눈물나도록 고마운 것은 신명을 바쳐 일하는 사람에 대한 대접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입니다. 자식 삼아 남겨놓은 '혼불'이 오늘 이렇게 당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님, 최명희님, 저는 저의 길을 가고 있읍니다. 고히 가십시오. 살아서 연연했던 일이 업이거늘 죽어서 보살되소서" 하며 세상은 당신의 혼불을 품에 안고 살 것이니 이제 고히 눈을 감으소서. 영생의 길이 있다면 그리 가시고, '혼불'의 산고가 있는 이 세상에는 다시 오지 마소서.

짧은 겨울해는 이제 뉘엿대며 가고 있다.
나는 남은 술을 묘지 주위에 뿌리며 "고이 가소서, 고이 가소서" 하며 그이의 영혼을 다독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