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경제난이다.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고, 경마장에 드나들고, 개장한 카지노로 향한다. 지하철 복권매장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경마장이 끝날 무렵에 맥풀린 눈빛으로 걸어나오고, 카지노 뒷편 나무 의자에 피곤한 몸을 누인다.
믿을 것은 오로지 돈 밖에 없다. 자식도 마누라도 믿을 게 못 되고 수중에 있는 현금밖에는 믿을 게 없다. 자본이 주인되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와 자본과의 직접 거래만 있을 뿐, 사람과 사람의 연대는 없다.
과거에 우리에겐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서로의 믿음으로 이뤄진 계가 있었고, 내가 너를 도우면 네가 나를 돕는다는 두레의 전통이 있었다. 너와 나의 계약 이전에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선량한 백성들은 그 기억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지, 악한들도 그냥 믿으면서 그 믿음의 근거를 확인하지 않는다. 아마도 믿음의 근거를 물으면 선량하지 않은 백성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가 보다.
쫀쫀한 인간이라는 것을 듣기 싫어서인지, 수십만, 수백만짜리 물건을 사도 영수증도 받지 않고, 계약서도 만들지 않는다. 근거하는 것은 오로지 확인되지 않는 믿음밖에 없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악한들의 교언영색은 사라지고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듯 오리발을 내민다. 선량한 백성들은 눈에 쌍심지를 키며 인간이 이럴 수가 있냐고 대들지만 어쩔 수 없다. 증거가 없고 증인이 없으니...
선량한 백성들이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쫀쫀해질 수밖에 없다. 문자와 문자 사이를 읽고 행간과 행간 사이를 읽어 쫀쫀함의 극치를 달려야 한다.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스스로 이해되는 문자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선량한 백성들이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는 없다. 백 년 전 중국의 사상가 노신이 그 이유를 말해줬다. "옛 것은 사랑할 수 있으나 믿을 수 없고, 요즘 것은 믿을 수 있으나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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