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같은 연수가 듣고 싶다

등록 2000.12.29 20:18수정 2000.12.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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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가까워 오면 학교에서는 여기 저기 캐비넷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교사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겨울 방학을 겨냥한 수많은 종류의 연수가 공고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교사연수에도 인색해져 대부분이 자비연수이고 저같이 어정쩡한 경력(6-7년차)으로는 그나마 가뭄에 콩나듯 교육청에서 지원해주는 괜찮은 연수는 기대하지도 못해요. 제 차지가 오려면 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거예요.

자비연수가 많아지면서 우후죽순으로 많은 연수기관이 난립을 하고, 승진을 위한 학점이수에서부터 연수를 통한 연찬이라는 뒤섞여진 여러 목적들로 교사들을 손짓합니다. 적게는 13만원부터 많게는 30만원까지 만만치않은 연수비를 지불하며, 교사들도 나름대로 살아남을 궁리와 가르치는 자로서의 본질적인 고민을 하는 셈이죠.

내년에 3학년 담임으로 낙점될 것 같은 제발저림에, 저는 진로상담연수에 관심이 갔습니다. 아무리 성적 몇 점 차이로 고등학교 간판이 달라지는 현실이지만(경기도는 대부분이 비평준화 지역입니다), 내년만은 아이들과 좀 다른 얘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 소박하고 당연한 꿈이 참으로 야무진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연수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만요.

연수 장소인 **중학교 시청각실로 찾아갔을 때 음악실에 놓이는 길고 딱딱한 의자에 우선 숨이 막혔습니다. 이 곳에서 하루 6-7시간씩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속상했지만 열악한 학교 현장에 있는 우리들이야 알아서 감내해야죠, 뭐.

춥고 썰렁한 그 곳에 온 선생님들은 대부분 연배가 40-50대 선생님들이라 제가 가장 어린 교사였습니다.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연수 주최기관인 '경기 카운슬러협회'는 정년 퇴임한 교장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기관이며, 그들의 왕성한 사회활동과 교감, 교장 승진을 위해 학점을 따려는 교사들을 위한 보루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온 선생님들은 연수내용이나 연수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최고 점수를 따서 빨리 승진을 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이죠.

올해 안에 연수가 이루어져야 내년 3월에 발령날 승진자들에게 이 점수가 사용되는 까닭에, 60시간이 넘는 일반연수가 되려면 12일 정도 걸쳐 수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대부분 방학식이 19일-20일인 학교 사정에 맞추면 해를 넘겨야 하니까 18일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출장을 달고, 방학식도 하지 못하고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그 때는 연수가 왜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지 몰랐지만).

저를 포함해 세상 물정 모르고 덤벼들었던 몇 몇 선생님들은 형편없는 연수 계획과 강사의 수준 낮은 강의내용, 진로상담과 직접 관련없는 내용들에 하루 하루 지쳐갔습니다. 도대체 통일교육과 진로상담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격려하러 온 교육장 말씀에 따르면 퇴직하고 편안히 쉬어야 할 선배님들께서 후진양성을 위해 이렇게 애를 쓰시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전문 상담교사는 고작 2명 정도였나요. 대부분 전직 교장, 현직 교장들도 이루어져 현장과 격리된 상담 이론 몇 개와 짜깁기해 가져온 내용들이 한없이 우리를 낙담하게 했습니다. 십여 가지의 강의 중 건질 것이라고는 두세 개. 결국 그것으로 입맛만 다시면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시험점수와 승진이 목적이었던 집단을 위함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하러 온 사람마다 문제를 눈물나도록 친절하게 짚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강사분은 저 같은 바보퉁이는 생각도 없는 듯 '승진하기 위해 모인 여러 선생님들'이라는 칭호를 서슴없이 가져다 붙이더군요.

마지막 연수 평가 시간에 많은 선생님들이 놀랍게도 강의 내용에 별 생각없이 우수하다는 평점을 인심 좋게 주셨다고 하더군요. 승진을 위한 연수에 익숙해진 많은 선생님들 눈에 이 연수도 다른 연수와 별 차이 없는 그저 그런 연수니 크게 비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승진이 급하지 않은, 혹은 나름대로 연수의 목적을 달리 품고 온 선생님들만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성토를 했을 뿐입니다.

"우린 그저 들러리였어"라는 어느 선생님의 말처럼 우리도 들러리가 아니고, 주역으로 이 연수에 동질적인 목적으로 참여할 때 별 다른 생각없이 연수에 우수한 평점을 주며 그렇게 물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파랗던 우리의 꿈과 기대가 산산히 깨어지고, 자기 연찬에 대한 노력마저 이렇게 물거품되는 현실에서 편히 쉬시지도 못하고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 선배님들께 감사했다고 할 수 없어 죄송해해야 하는건지요.

강의 계획안에 대한 안내도 없는 이 연수에, 이렇다 할 정보도 모르고 찾아온 제 잘못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했어야 했겠지요. 무너져간다는 학교 현실에서, 18년간의 학교지식이 8000원 정도의 가치밖에 안된다는 요즘, 저는 무엇을 팔면서 어떻게 서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교사 대상으로 하는 연수 정도는 국가에서, 아니면 연수기관에서 '생명'처럼 보살피면 안 되는 일일까요. 아니, 제가 또 야무졌네요. 기본만이라도, 본질만이라도 지켜주시면 안되는 것인지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시험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시험지에 보이는 많은 오타가 끝까지 저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덧붙이는 글 |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심성수련연수는 괜찮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서로 어깨를 토닥여줍니다.

덧붙이는 글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심성수련연수는 괜찮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서로 어깨를 토닥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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