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가 된 친구를 생각하며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등록 2000.12.31 19:59수정 2001.01.0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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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해의 때를 말끔히 벗기고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우리 동네 목욕탕은 내용년수를 다 한 것처럼 늘 썰렁합니다. 낡은 시설물을 개수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시설이 좋은 목욕탕으로 모두들 빠져나가고, 저처럼 게을러서 멀리 가기를 귀찮아하는 사람들만 드나듭니다. 그래도 2000년 마지막 날은 일요일에다가 오후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땀을 내려고 사우나실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꽉 차 있더군요. 이 목욕탕이 다른 시설은 낡고 엉망이지만 사우나실 만큼은 벽에 황토를 발라 괜찮은 편이라고 하더군요. 남들 하는 얘기를 얻어들은 것이지만. 한 아홉에서 열 명쯤 될까요. 여자들이 꽉 차 있었는데 몇 사람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고 공간이 작은 탓에 한구석에 낑겨 앉은 저에게도 아주 잘 들렸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택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택시기사의 아내들이었던 것입니다. 개인택시 값이 엄청나게 비싸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택시 기사들이 겪는 어려움 등이 내용의 주였습니다. 날마다 남편이 가져다 주는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푼돈이라서 흐지부지 날아가 버린다는 이야기, 술 마신 승객과 싸워서 돈 물어주었던 이야기, 택시값 내지 않고 줄행랑을 놓은 손님 이야기, 지갑에 분명히 돈이 있으면서 없다고 나자빠지는 승객은 곧바로 파출소로 모셔(?)가서 경찰을 통해 요금을 받으면 된다는 이야기 등이었죠.

그러면서 한달 벌이가 시원찮다는 이야기도 더불어 나왔습니다. 기껏 벌어야 한달에 150만원 정도밖에 손에 쥐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옆에서 한 여자가 거들더군요. 그 정도 벌면 먹고살지 않느냐고. 그러자 아이들 가르치려면 어림도 없다는 대꾸도 나왔습니다. 그들의 남편은 개인택시 기사인 모양이었습니다. 일을 하러 나가는 시간과 들어오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지요.

무심결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며칠 전에 전해 들었던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택시회사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던 친구였는데 그만두고 택시기사로 나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1월에 친구 어머니 칠순잔치 때 그 친구를 만났는데 월급이 너무 작다고 올려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중이라는 말을 했지요. 택시회사에서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백만원이 조금 넘을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그는 늘 생활에 쪼들리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한달에 백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건사하면서 살기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사교육비가 좀 들어야지요. 게다가 아이들이 원하는 건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 친구는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에게 넘겨줬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핸드폰을 사달라고 졸랐지만 형편을 생각하면 새 핸드폰을 선뜻 사줄 수 없었던 그 친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고등학생이 무슨 핸드폰이 필요하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핸드폰이 없으면 아이들한테 '왕따'를 당한다는 말에 그 친구는 핸드폰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바로 '왕따'니까요. '왕따'로 인해 빚어지는 수많은 학교 폭력사례가 부모들로 하여금 그 말을 가장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그 친구가 결국 택시기사로 나섰다는 이야기에 월급 올려받기가 실패로 끝났구나, 하는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택시도 아닌 회사택시를 운전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 친구가 안쓰러워졌습니다. 그 친구의 아내는 생활이 어렵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일이 꼬이는 사람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친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만나면 그 친구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듣고 있다보면 세상사는 게 참 힘겨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한탄조로 풀어내는 건 아닙니다. 개그맨 기질이 많은 그 친구는 그런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십 년 이상 그 친구를 만나온 저는 그 이야기의 행간에 묻어 있는 어려움을 쉽게 감지해내지요.

물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그 친구 뿐만은 아닙니다. 그 친구가 택시기사로 나섰다는 이야기를 전해준 친구 역시 벌써 일 년 가까이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직을 한 이 친구는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구로동 공구상가에서 베아링 가게를 하는 동생을 도와주고 있는 중입니다. 새 직장을 구하기에는 40대의 나이는 너무 많더군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일텐데 세상의 대접이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20대의 나이에는 40대쯤 되면 친구들도 대부분 생활이 안정되어 편안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40대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현실은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직장에서는 나이 들었다고 푸대접하면서 밀어내고, 새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공들여 키워야 하는 아이들이 있지요. 그렇다고 선뜻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목돈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 친구와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서 간단하게 생맥주라도 한잔해야 하는 건데 미처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12월 말경에 꼭 망년회를 하자고 했는데 결국 만나지 못하고 한 해를 보냅니다. 대신 가슴을 짠하게 하는 소식만 전해 듣고 말았습니다.

기왕에 택시기사로 나섰으니 그 친구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면하고 자신감을 잔뜩 가진 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 다시 만났을 때, "너 돈 많이 번다며? 한턱 단단히 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새해가 희망에 가득 찬 즐거운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슬기롭게 헤쳐 나올 수 있었어' 라고 회고할 수 있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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