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부산까지 <이 한걸음 바느질되어...>

구례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

등록 2001.01.02 22:59수정 2001.01.0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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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1일 오전 9시. 광주시청을 출발하여 망월동 5.18묘역을 경유한 일단의 무리가 지금 부산을 향하고 있다. 이들은 광주 문성 중학교 음악교사인 주국전 씨(42)를 주축으로 한, 동서간의 마음을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국민화해를 바라는 염원으로 뭉친 교사들과 제자들이다.

1월1일 광주를 출발한 그들은 지금(1월 2일 저녁 11시) 구례에서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순례를 준비하고 있다. 가는 길에 눈발과 바람에 맞서야 하는 힘든 길이었지만, 걷는 길에 만나는 주위의 많은 이들로부터 따뜻한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그런대로 육체적 피로를 잊고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화인터뷰에 응한 주국전 씨의 말은 더욱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섬진강에 접어들어 매서운 강바람에 잠시 몸을 숨기고도 싶었고, 간간히 마주치는 비웃는 듯한 무관심의 눈총에 이대로 되돌아 광주로 돌아 가고도 싶었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누군가에 의해 갈라진 <지역의 벽>에 저항하는 소시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다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기자를 다독거렸다.

잠시 바느질걸음을 하고 있는 그의 음성을 들어보자.

<주국전 씨의 편지>

아침 8시 30분 옥과를 출발 곡성을 향해 걸었습니다.
곡성재를 올라채서 휘돌아 가는데..
실눈발이 흩날렸구요..
체감온도가 갑자기 - 2도 정도 떨어집니다.

곡성에 접어들제...
'들풀'님의 울음섞인 전화소리에 또 힘이 솟고 아버님 같은 정을 뚝뚝 느꼈습니다. 두명은 가는 방향 두명은 오는 방향을 잡아서 손에 든 깃발을 치켜 세우며 지나가는 차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단 한대의 차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꼽발 디뎌가며 보여 주었습니다.

작은 깃발에 쓰인 글씨 못볼까 싶어 흔들지도 못하고 두손을 받쳐 들어 보여주었습니다.수없이 지나치던 차속의 사람들의 표정도 여러가지더군요. 노사모 식구들, 상상하실 수 있죠? 어떤 표정들이었는지...

힘차게 손 흔들어 주는 사람.
저게 뭐야? 하는 표정.
미친애들 아냐? 하는 표정.
안쓰러운 미소 담아 다섯 손가락 쥐락펴락하며 응원 해 주던 사람.
충청의 '오재미'님 닮은 아줌마가 모는 봉고 속에서 연신 고구마 같은 것을 까먹고 있던 사람..

딱 한명. 네 손가락은 접고 중지를 길게 보여 주며 입모양은 '벅규' 하던 사람. 하두 기가 막혀 뒤돌아서 보았더니 그 차 뒷창에 'ㅇㅇ일보'라고 씌여진 스티커가 보여요. 역시...

곡성에 도착해서 맛있는 '추어탕' '김치찌개' 시켜 먹고 다시 일어섰어요. 쉬었다 일어설 때가 제일 힘들어요.. 차라리 쉬지말고 계속 가버릴까나~~~~룰루~~~

드디어 섬진강.
더욱 차가워진 바람.
밀가루 보다 더 가는 눈발이 반가웠어요.
왜냐구?
며칠 전에 이런 예감을 했거든요.
섬진강 접어들면서 고운 눈발이 내리면 멋질 거야.
그런데.. 진짜루 그 눈이 내리네요.

점점 뉘엿거리는 저녁 햇살에 그 맑은 섬진강이 회색빛깔로 물비늘 빤짝거렸어요. 춥디 추운 강물에 한 무리의 왜가리떼. 그리고 물오리떼. 왠지 그 녀석들이 나처럼 느껴지더군요. 추운데 집에 가만히 있지 추운 섬진강은 왜 찾아 왔어? 바부들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어. 조금만 더.
발바닥이 저려온다고 힘들어 하는 학일이.
선생님 빨리 가서 피시방가요, 네?
아직 까닥 없는 필중이. 사랑스럽네요 정말. 내가 선생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덤푸트럭에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내 깃발 바라보던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오후 5시 30분. 어제 같은 그림자도 볼 수 없는 진회색의 하늘빛이 되어 있었습니다. 종아리가 거의 무감각 상태여서인지 오히려 가벼운 구보를 할 수 있어요.

오늘 역시 오는 동안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려전화. 신문사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님들의 전화 목소리는 '박하향기'처럼 힘이 됩니다. 조금 피곤이 몰려오네요.
이제 들어가 어제보다 더 깊은 잠 자고 싶어요.

아~~참. 어제는 새벽 3시에 눈이 떠졌어요.
잠자리가 바뀐 탓도 있었지만 종아리에 쥐가 났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맨소래담'연고 연신 문질러 대고 다시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 30여분 족욕 했지요. 한결 기분이 상쾌해 지고 그 덕분에 아침에 힘차게 발걸음 뗄 수 있었어요. 아마 오늘 새벽에도...

여긴 '구례'에 있는 피시방입니다.
필중이, 학일이, 도관이, 강희 모두 게임하느라 열중이구요.
노사모 게시판에 남겨진 글들을 읽고 내 눈에 한웅큼 눈물이 괴였어요. 부산까진 절대로 절대로 눈물 방울 떨어뜨리진 않을 겁니다. 그 곳 부산에 가서 막 울고 싶어요. 엄청 큰 소리로 울고 싶어요.

사랑하는 식구들 정말 감사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잘들 쉬세요.

'이틀째 날 구례에서 미풍이'

걷고 있는 그들을 비웃는 자들에게 되물어 보고 싶다.
지역주의에 대해 철저한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면서도 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군림하려 하는 자들에게, 본 기자는 되묻고 싶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나라가, 단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미움받거나 차별하는 나라라는 걸 아느냐고. 영남, 호남으로 쫙 갈려 서로를 질시하고 증오하는 현실을 잘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나아가 더욱 조장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영달을 꾀하고 싶으냐고. 당신들의 자녀가 경상도사투리를 쓴다는 것만으로 전라도사투리를 쓴다는 것만으로 학교에서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있다면 그 때에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와 부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겠느냐고..."

기자는 한 겨울길을 걷고 있는 교사와 제자들을 대신해, 비웃거나 침묵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식인이든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이젠 고민해야 하고 말해야 한다고, 우리의 눈맑은 어린이들에게까지 타 지역민에 대한 증오와 멸시를 대물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젠 어떻게 해서든 지역이 화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지식인이 아닌 모리배일 뿐이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지역주의의 희생자들에게 돌팔매를 가하는, 또는 방조하는 역사의 죄인일 뿐이라고...

내일도 해가 뜰 무렵, 교사와 그의 제자들은 길을 걸을 것이다.
섬진강을 따라가며 화개장터를 지나 하동으로...

그들이 말한대로 단 한사람이라도 지역주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평범한 민중이 승리하는 길임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 담겨진 5.18묘역의 따뜻한 흙내음을, 기자는 이 차가운 컴퓨터 앞에서도 맡고 싶다.

길떠난 그들의 길이 부디 안전하고 건강한 바느질 걸음(부산길)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주국전님과 제자들은 1월 10일 부산에 도착합니다.

덧붙이는 글 주국전님과 제자들은 1월 10일 부산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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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것은 보편적인간의 허약함이다. 이 허약함으로나마 이 시대의 부정성을 감당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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