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빠가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파리로 떠났다. 작곡이론과를 공부하다가 파리에 가서는 피아노과로 바꾸어 공부하게 된다. 그 오빠가 파리에 산 지 어느덧 5년. 오빠와 오빠를 감싸안고 있는 파리가 궁금했던 나는 6개월 정도 준비기간을 갖고 마침내 1996년 9월 12일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일주일 동안 오빠와 함께 보낸 파리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이다. 3편에서는 파리의 묘지, 프랑스식 저녁 식사, 보금자리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담았다.
1996년 9월 16일
오전에 쇼핑을 했다. 친척 선물을 사면서 오빠 선물도 함께 샀다. 강아지 장식품과 방석을 오빠 선물로 골랐다. 내가 입고 간 바지가 마음에 든다고 하길래 입으라고 주었다. 오빠도 하얀 면자켓을 입으라고 나에게 주었다. 일종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진 셈이다. 기장이 긴 바지는 바느질해 주었다. 별로 신통찮은 바느질 실력인데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라며 칭찬해 주는 작은오빠.
점심은 중국집에서 사온 만두로 하고 몽마르뜨 묘지에 갔다. 파리의 묘지는 우리나라에 비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소가 소박하고 담담한 데 비해 파리의 묘지는 고인을 기억할 만한 사진 액자며, 생화, 고인을 위한 작은 교회 건축물까지 세워놓은 것이 제법 보였다.
무덤자리 뒷부분에 백합이 싱싱하게 놓여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소녀의 얼굴이 애잔하게 다가왔다. 이 묘지는 공공기관 관할이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들만 묻힐 수 있다는데 저 소녀는 무엇으로 유명했을까가 궁금하였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 섹스 숍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캉캉 춤으로 유명한 물랑 루즈 앞에서 섹시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몽마르뜨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사원 내부를 구경했는데 외관이 어딘지 모르게 회교사원 같았다.
몽마르뜨 언덕의 화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의 초상화를 그려줄 테니 사라고 권하는 화가들 사이를 누비며 그림을 보았는데 유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풍경화가 많았고 기법은 조금씩 달랐는데 주로 밝은 톤으로 그리는 듯했다.
전철을 타고 센 강보다는 덜 멋진 꺄냘 운하를 보고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집으로 갔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집 근처의 뷔트쇼몽 공원을 산책했다. 꼭대기에 정자가 있는 절벽, 진짜처럼 자연스러운 인공 폭포가 있었고, 연못에는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리, 백조, 기러기 등의 여러 새들이 한가로이 물 위에 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바게뜨빵을 먹고 있는데 참새들이 몰려들었다. 빵 부스러기를 주니 낼름 받아먹고 초롱한 눈망울로 빤히 쳐다본다. 빵 부스러기를 계속 주니 참새들은 점점 대담해져서 내 손바닥 위에 놓인 빵 부스러기마저 먹으러 왔다.
공원을 걸으면서 오빠가 서울대 음대 작곡이론과로 가게 된 계기, 거기서 나용이라는 선배 누나를 만나게 된 얘기, 그녀와 함께 파리로 오게 된 얘기 등 많은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초대받은 프랑스인의 집 문 앞에 서게 되었다.
크리스티앙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집인데 그는 오빠와 음악공부를 같이 하다가 음악을 그만 두고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빠와 친해서 자주 왕래하는 친구였다. 따뜻하고 친절한 프랑스인이었다.
저녁식사는 프랑스식으로 올리브유와 후추 소스를 친 훈제 연어, 이태리 치즈가 든 샐러드, 양 구이와 감자, 케이크, 포도주를 대접받았다. 양고기가 아주 담백하고 연했다. 포도주도 두 잔이나 마셨다.
나는 간단한 프랑스어로 "세시봉(아주 맛있어요)"를 연발했고 오빠는 "끄윽"(트림소리)과 "뽀옹"(방귀소리), "빠흐동(미안해)"을 연발했다. 오빠가 낸 소리는 프랑스인들 사이에는 큰 실례로 여겨지는 것이지만 오빠와 크리스티앙은 개의치 않고 웃고 즐거워했다.
크리스티앙은 아기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프랑스까지 날아온 나를, 용기 있는 한국 여성이라고 칭찬했다. 즐겁고 따뜻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10시 40분쯤 크리스티앙과 헤어졌다.
파리 시내에서는 밤과 아침에, 특히 밤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밤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습관화하고 있는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은 한적하여 좀 무서웠다.
시차 적응하느라 늘 초저녁에 자다가 이날만은 12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파리 한복판에서 한국의 사랑하는 남편과 딸 다정이 꿈을 꾸었다.
1996년 9월 17일
이제 슬슬 한국 생각이 난다. 여행자로서 온 때문일까. 누군가가 여행은 돌아가기 위해서 떠나는 거라고 했는데 정말 동감이다. 한국에서 가깝게 지내던 이들을 위한 선물을 고민하면서 나의 마음은 이미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제일 그립고 딸 다정이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파리에 대해서는 전통에의 긍지, 자기 방식대로의 삶 그런 것을 느꼈다. 전철에 따로 마련된 1등석(시설은 일반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외 전철 요금이 턱없이 비싼 것 등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파리에 와서 지내는 동안 그간 시간의 공백 위에 있었던, 오빠의 사는 모습과 생각을 만져봄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고리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남편에게 있어서 내 존재의 비중도 확인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오늘은 오페라 극장 뒷편에 있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 남편 넥타이, 오빠의 나무 주걱(조리용 기구), 조카들 선물을 샀다.루브르 미술관 근처에 도착하고 보니 3시가 못 되었다. 3시부터는 입장료를 반값만 내도 된다고 해서 남은 시간 동안 세느 강을 산책했다.
세느 강에서 웃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일광욕하는 남자를 보았다. 여름에는 아예 나체로 일광욕하는 남자들도 있다 하니 다음에 파리 올 때는 여름을 맞춰 와야겠다.
3시에 루브르에 가니 하필 휴관이었다. 그래서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며 아이 쇼핑을 하면서 개선문까지 걸었다. 샹젤리제는 밤이 더 멋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훔쳐왔다는 오벨리스크 탑을 콩코르드 광장에서 보았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여러 개의 분수에는 분수 수만큼 무지개가 고왔다.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고 있으니 남편 전화가 왔다. 아주 바쁜데도 밤에 돌아오면 허전해서 미치겠다고 한다.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시들하고 파리의 아름다운 건물 모습도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파리에서 새로운 것, 파리다운 것으로 내 시간을 꽉 채우고 싶었으나 그것도 시들해졌다. 한국에 내가 남겨두고 온 빈 자리가 그리워서일까.
나는 안다, 한국에 돌아가면 파리가 간절히 그리워질 것이라는 걸. 테라스의 꽃 화분이, 아름다운 파리의 건물들이, 휴식 같은 예쁜 공원이, 나이 많은 나무들이, 잠재된 기억을 일깨워 준 베르샤이유 정원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에 남겨놓고 온 나의 작은 집이, 작은 사랑이 보고 싶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