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의 겨울나기는 그 자체가 고통이다. 더구나 등대고 누울 잠자리조차 없는 노숙자들에게 겨울은 차라리 죽음과 같은 계절일 수밖에 없다.
기상이변이라고 할 만큼의 폭설이 내린 지난 7일 밤 대전역 주변 노숙자들은 추위도 견디기 힘든데 눈까지 내리니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내일은 눈이 안 올 것 같지? 하늘에 별이 뜬 걸 보니?"
"몰러. 뉴스에서는 또 눈이 온다고 하던디."
역 광장 한 귀퉁이에서 노숙자 서너 명이 담배를 나눠 피며 날씨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눈까지 내리니 노숙 생활에 대한 신세 한탄이 길어지는 듯했다.
두 달전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갈 곳이 없어 대전역에 나와 있다는 안동 권씨(71세)라고만 소개한 한 할아버지는 대전역 광장에 쌓인 눈을 가리키며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밀가루였으면 좋겄어. 그럼 수제비도 해먹을 수 있고, 칼국수도 해 먹을 수 있을 텐디. 젊은 것들은 눈이 와서 좋은 모양이여. 근디 나 같은 사람이야 쓰잘데기 없지 뭐. 먹을 것도 아닌디. 하늘서 밀가루나 펑펑 쏟아졌으면 좋겄다"고 말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자꾸 어지럽다는 권할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마저 원망스럽다. 자식들이 없느냐는 질문에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한 것이 자식이라고 자식 얘기를 꺼내자 손까지 내저으며 말문을 막았다.
대전역은 요즘 들어 노숙자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서울역이나 부산역 등 다른 역은 폐쇄시간이 있어 노숙자들이 추위를 달래는데 한계가 있으나 중앙에 위치한 대전역은 24시간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타지방의 노숙자들도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부산이 집이라고 소개한 이씨(54세)는 부산에 있으면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려워 아는 사람 없고 24시간 개방된다는 대전역이 겨울나기 좋을 것 같아 대전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막노동을 해서 생계를 꾸려왔던 이씨는 일자리가 없어 돈을 못 벌어오니 부인도 집을 나가고 애들도 자신을 가장처럼 여기지 않아 노숙을 시작했는데 차라리 이 생활이 편하다고 했다.
그의 하루의 첫 시작은 생활정보신문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실망하며 신문을 접을 때가 다반사라고 했다.
이씨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자 누가 팔을 붙잡았다. "아가씨, 뭐하는 사람이오? 기자야? 우리 얘기 써 봤자 다 헛지랄이야.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근로의 의무 다 지켜도 나 같은 사람 알아주덜 안해. 의무이행 안하는 놈들이 더 잘 살어. 세금 안내고 국방의 의무 안 지켜도 더 잘살어. 어떻게 된 놈의 세상이…. 이런 세상 고칠 것 아니면 우리 얘기 쓰덜 말어. 기분 나뻐. 우리 같은 놈들은 사람 취급도 안하는디."
이렇게 취재를 막은 임 할아버지(68세)는 취재에 응해줄 테니 커피 한잔 사라고 커피자판기 앞으로 이끌고 갔다. 커피를 받아든 임 할아버지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회사 다니다가 명퇴 당하고 그 돈으로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빚만 지고 갚을 길 없어 집을 나온 것이 이렇게 노숙생활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처럼 사회에 할 만큼 한 사람은 오히려 자꾸만 힘들어지고 의무 안 지키고 혼자 잘 살겠다는 부유층은 경제가 악화되면 될수록 더 잘사는 이 사회가 구역질 난다며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임 할아버지에게 소원이 있느냐고 물어 보자 "우리 같은 사람에게 소원이랄 게 뭐 있나. 그저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먹으며 등 붙이고 편하게 누워 잘 수 있으면 되는 거지."
너무도 소박한 꿈이지만 노숙자에게는 언제쯤 그 꿈이 이뤄질지 알 수가 없다.
잠잘 때 깔고 자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큰 검은 비닐 봉지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다니는 사람들, 대합실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역을 찾은 여행객들에게 가끔 손을 벌리기도 하는 사람들, 역 광장 구석에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낮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갈곳 없이 늦은 밤 역 대합실 한 귀퉁이 의자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사람들, 차라리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밀가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노숙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웃이었던 이들을 '노숙자'라 부르며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또 다시 경기 한파가 불어닥치고 실업자 100만 명이 넘는 시대가 왔다. 길거리에 점점 늘어가는 노숙자들. 그들에게는 눈 덮힌 이 겨울은 절망이다. 그들이 언제쯤 하늘에서 내린 눈을 따뜻한 집에서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취재 후기 ; 임 할아버지에게 커피를 사드린 후 소문이 퍼져 노숙자 분이 계속 찾아오셔서 몇몇 분들에게 커피를 사드리고 서둘러 대전역을 빠져 나왔습니다. 맘 같아서는 그 곳에 계신 분들 모두에게 사들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맘에 걸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백하자면 여자이고 혼자여서 여러 노숙자 분들이 다가오니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역을 서둘러 나왔습니다. 저 자신조차도 노숙자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무거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번에 기회가 닿으면 노숙자 분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 대접할 수 있는 '이동 커피'같은 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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