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간은 못 구해 드려도...

<미국 사는 이야기 36> 아름다운 나의 엄마에게

등록 2001.01.23 04:10수정 2001.01.2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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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선물을 보냈어요.
오늘이 엄마 생일인데 이제야 부쳤어요. 맨 날 뭐가 그렇게 바쁜지 참 몹쓸 딸이지요? 이거 부치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는 거 알면서도.


"목소리 들으면 됐지. 카드나 한 장 부치지 그랬니. 엄마 필요한 거 없다니까, 왜 돈 들여서 그런 거 부치니? 너 쓸 데 많을 텐데."
엄마는 해마다 내 생일, 애들 생일 하나 안 놓치고 다 챙겨 주면서 또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래도, 또 그렇게 잔소리를 들어도 올해는 꼭 뭘 하나 사드리고 싶었어요. 곧, 설이라는데 세배를 못 드린 지도 벌써 몇 해를 넘겼잖아요.

뭐가 좋을까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생각하다가는 '그래, 시계가 좋겠다'하고는 손목시계를 하나 샀어요. 내가 엄마 선물로 손목시계를 고르게 된 건, 우리 가연이 때문이에요. 글쎄 우리 가연이가 지난번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시계를 하나 사서 내 손목에 채워주더라구요.

처음 딸이 사 주는 선물을 받는 감격이라니. 가슴이 뜨뜻해지고 입매가 저절로 느슨해지더니 눈물마저 고여오더라구요. 정말이지 자식 키우는 어려움이 모두 달아날 만큼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물론 가연이는 그 동안 아주 많은 선물을 내게 주었지요. 자기 손바닥이 찍힌 티셔츠, 자기 사진을 넣어 만든 액자, 일년 내내 걸어두고 볼 수 있도록 직접 그리고 만든 달력, "all about my mother"라고 쓴 저널, 학교에서 포장지까지 예쁘게 만들어 싸 가지고 온 선물을 풀 때마다 차오르던 기쁨 속에서도 종종 엄마 생각을 했어요. 나도 엄마에게 이런 기쁨이었을까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트를 그리고 그 속에 "I love you, Mom."을 써 주던 작은 쪽지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나를 붙들던 '허그(Hug)'와 '뽀뽀'들. 천방지축 까불어대고 떠들던 소리들. 온 동네 저밖에 없는 것 같이 깔깔거리던 웃음소리. 그리고, 가끔씩 이런 선물도 했지요.


"엄마도 옛날에 하드타임(hard time)이 있었어요?"
"I feel lonely."
눈 속 가득 솟구쳐 오르던 눈물을 툭. 툭. 떨구며 안겨오던 가연이.
그 애가 글쎄 이렇게 커서 저금통장을 다 털어 엄마 선물이라고 시계를 샀더라구요. 조그맣고 동그란 얼굴에 가느다란 은빛줄이 예스러운 시계를 말이지요.

지난 여름에 산 시계가 고장나서 이걸 고쳐야 하는데 하고 말했던 걸 가연이가 맘에 두었나봐요. 그런데 그 시계를 차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나잖아요? 내가 엄마생각에 젖었던 건 시계 모양이 늘 엄마가 차고 다니던 결혼 기념 손목시계 모양과 비슷해서만은 아닐 거예요.


엄마,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시계가 너무 예뻐서 나는 언제나 커서 이런 시계 차볼 수 있을까 빨리 어른이 돼야지 했던 거 아세요? 그리고 결혼을 하면 나도 이런 시계를 찰 수 있겠지 했는데 어느새 나도 가연이를 낳고 가연이는 또 나무처럼 커서 이렇게 예쁜 시계를 선물하네요.

가연이는 이제 동요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냅스터를 찾아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아바 틴을 즐겨 들어요. 이제 곧 다가올 사춘기를 걱정해야 하겠죠. 부엌에서 김치 부침개와 꼬마 핫도그를 같이 만들고 벌써 줄어든 내 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무거운 그로서리 백을 몇 개씩 번쩍 번쩍 들어다 주고 그야말로 '엄마와 딸'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해지는 시간 위로 가연이는 훌쩍 커버렸는데 엄마, 나는 아직도 엄마 앞에 어린애인 것은 아닌지.

가연이는 오늘도 너무 많은 선물들을 내게 주는데 나는 엄마한테 걱정만 안겨드리는 건 아닌지. 새삼 엄마한테 미안하고 늘 부끄러운 꼴만 보이는 것같아 속상하고 그래요.

철모르고 애 낳아 그게 그저 이뻐 좋아하기만 했다가 요즘같이 엄마로 살아간다는 게 힘든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하루 세 끼 밥 챙겨 먹이고 이쁘다고 안아주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아이들 키가 클 수록, 해가 더 할수록 뼛속 깊이 느껴지는데 나는 정말 좋은 엄마인지.

애들 데리고 삶에 부대끼며 누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하다가도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지금 애들에게 부끄럼 없이 똑바로 가고 있는 건지. 가르쳐야 할 것 가르치고 보여줘야 할 것 보여주고 살고 있는 건지.

무심코 내 뱉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아이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가연이가 어른이 된 후에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엄마는 어떤 모습일지. 내 딸이 "나도 이 다음에 엄마처럼 살아야지"라고 말한다면 더 큰 바람이 없겠다고 살아왔는데 그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아이들 키가 더해질수록 깨달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참 성공했어요.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아름다운 엄마'니까요. 거울 앞에 앉아 눈썹을 고르고 분을 바르며 화장하던 엄마는 참 아름다웠어요. 건강치 못한 딸을 위해 하루 다섯 끼 죽을 끓여내고 도시락을 나르며 시험 때면 옆에서 같이 밤을 새워 주시던 엄마, 엄마는 정말이지 목이 메일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가장 힘들 때 아빠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안 하시던 일을 하며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을 보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일 하시는 엄마의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엄마, 엄마라고 왜 힘들 때가 없으셨겠어요. 엄마, 엄마라고 왜 엄마임을 포기하고 싶을 때 없으셨겠어요. "힘들 땐 너 보고 살았다."
언젠가 제게 말씀해 주시던 그 한마디가 오늘 저를 울립니다.

엄마, 어제는 "주연이한테 감기 옮았나 보다. 머리가 좀 아프네"했더니 가연이가 글쎄 이래요.
"어엉? 엄마, Don't worry. I will get the 토끼 간." 며칠 전 잠자리에서 용왕님의 몹쓸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간을 구하러 간 자라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엄마, 가연이가 정말 토끼간을 빼 왔더라구요. 순간 머리 아픈 게 싹 나았거든요.

엄마, 아픈 다리는 좀 어떠세요. 가연이는 토끼간도 구해 준다는데 엄마, 나는 오늘 엄마한테 시계 하나 사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엄마 손목에 채워진 시계와 내 손목에 채워진 시계바늘 움직여 가는 만큼 나도 '아름다운 엄마'로 모습 갖춰 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바늘이 25년쯤 돌아간 후에 가연이 손목에도 똑같은 시계 하나 채워진다면 그때에 '엄마 된 도리'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나의 엄마, 생일 축하드려요.

덧붙이는 글 | 어머니의 강

모진 산고를 겪던 그 날
끝내 참아 삼키지 못하고
울부짖던 어머니
땀과 피 한데 섞어
그렇게 발원한 어머니의 강은

밤새 열병을 앓는 
갓난 아들을 품에 안고
아직은 여리기만한
딸애의 종아리에 손을 대고는
흐르고 흘러 흐르고 흐르더니

방황하는 청춘을 볼모로
아들이 처음 집을 나간 날에도
결혼하는 딸의 
행복한 웃음을 보던 날에도
밤새워 흘러 흐르고 흘러

그뿐만 아니었지
술에 땀에 그리고 외로움에 젖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또 다른 샛강은 
흐러고 흘러 흐르고 흘러

친구의 시린 이야기에도
어떤 날은 TV를 보면서도
문득 문득 눈시울이 붉어져
또 그렇게 무심히
흘려보내는 샛강이려니

오늘
넉넉함으로 출렁이는 소리
다시 돌아보니
샛강마다 흘러든
큰 강 하나 보이네

온갖 회한과 염려와 한숨
다 갈 앉은 강
저 강이 옥토 만들어
세상을 세우는 줄
이제야 아네

덧붙이는 글 어머니의 강

모진 산고를 겪던 그 날
끝내 참아 삼키지 못하고
울부짖던 어머니
땀과 피 한데 섞어
그렇게 발원한 어머니의 강은

밤새 열병을 앓는 
갓난 아들을 품에 안고
아직은 여리기만한
딸애의 종아리에 손을 대고는
흐르고 흘러 흐르고 흐르더니

방황하는 청춘을 볼모로
아들이 처음 집을 나간 날에도
결혼하는 딸의 
행복한 웃음을 보던 날에도
밤새워 흘러 흐르고 흘러

그뿐만 아니었지
술에 땀에 그리고 외로움에 젖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또 다른 샛강은 
흐러고 흘러 흐르고 흘러

친구의 시린 이야기에도
어떤 날은 TV를 보면서도
문득 문득 눈시울이 붉어져
또 그렇게 무심히
흘려보내는 샛강이려니

오늘
넉넉함으로 출렁이는 소리
다시 돌아보니
샛강마다 흘러든
큰 강 하나 보이네

온갖 회한과 염려와 한숨
다 갈 앉은 강
저 강이 옥토 만들어
세상을 세우는 줄
이제야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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