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14km 앞에 두고, 아프리카여 안녕
지브랄타르에서의 기억 한 토막. 이곳은 영국령이면서도 인접한 스페인과 모든 물가가 비슷하다. 영국 본토에서는 1리터에 80페니, 한국돈 1600원 하는 휘발유가 지브랄타르에서는 단돈 50페니(1000원)에 불과했다. 기념으로 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주유소 직원에게서 영어로 된 영수증을 챙겨 놓았다. 옥스퍼드에 돌아가면 코팅해서 자동차 앞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리라 마음먹었다. 영국의 살인적 물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말보로 담배 한 갑이 9000원이다).
다시 지브랄타르로 돌아오면 면적은 6.5k㎥ 서울 여의도보다 조금 크거나 작아 보인다. 이 좁은 곳에 영국인들이 군사와 관광과 생활의 용도로 곳곳에 동굴을 뚫어놓아 벌집을 연상시켰다. 더 록(The Rock)이라 부르는 바위산 꼭대기는 해발 423m.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상당히 높게 느껴진다.
바위산의 동쪽으로는 길이가 1.5km는 됨직한 긴 동굴이 있다. 바위가 워낙 단단해 별도의 안전시설 없이 그냥 굴만 뚫어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일반 터널처럼 시멘트로 지하수나 낙석을 방비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巖質(암질)이 단단해 보였다. 영국인들은 자급자족의 정신에 따라 이 바위산 곳곳에 동굴을 파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한다.
역사의 현장, 지브랄타르에서는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15km 밖 북아프리카가 옆 마을처럼 보인다. 특히 모로코 탕헤르 항의 불빛은 20리에 걸쳐 참으로 휘황하다. 두 대륙에 인접해 있는 두 항구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불현듯 地政學(지정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깊어졌다.
유럽의 해수욕장이 된 남 스페인의 400km 해안
등대 옆의 탑에서 기념 사진을 몇 장 찍고 철수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사진을 찍자고 하니 가족들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브랄타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연거퍼 "페리 타고 아프리카 가자"고 하자 모두 "노"한다. 두 대륙의 거리가 불과 14km여서 서해대교 길이의 몇 배 안 된다. 페리로는 1시간이 채 안되며 워낙 가깝다 보니 최근에는 모로코에서 헤엄쳐서 넘어오는 불법 이주자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말라가. '유럽의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내가 단정적으로 이곳을 유럽의 해수욕장이라고 한 이유는 그만큼 유럽 전체에서 이것을 찾는 휴가객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유럽의 보편적 관광객, 돈은 좀 있고 날씨가 우중충한 나라에 사는 영국·독일 사람들에게 남프랑스 해안은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스페인과 이태리의 해수욕장은 우리나라의 동해안, 서해안 해수욕장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해운대는 몇십 만원 있어야 엄두를 내지만 동해안은 쌀 몇 되와 돈 십 만원 가지고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실제 유럽을 다니면 영국, 독일 사람 휴가족이 가장 많다. 프랑스, 베네룩스 3국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그 뒤를 잇는다.
영국 독일이 어떤 곳인가. 일년 중 절반은 춥고 을씨년스런 기후가 계속되는 곳이다. 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보았을 때 영국, 독일 사람들에게 남쪽 바다란 스페인, 이탈리아의 해변이다. 프랑스에도 니스와 칸느 등 이른바 코뜨 다쥐르라 부르는 천하 절경이 있지만 물가가 비싸서 보편적이지 못하다. 반면 스페인의 물가는 영국의 60%수준이다.
우리가 배낭 메고 에펠탑 구경할 때 그들은....
말라가는 바로 이 '유럽의 해수욕장'의 중심 도시이다. 카디즈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해안선을 달리기 시작하면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 장장 400km에 걸쳐 펼쳐진다. 이태리 가곡 '오 솔레미오(오 나의 태양)'를 연상하니 코스타 델 솔이라는 지명이 이해가 갔다.
해안선을 따라 언덕을 넘을 때마다 나타나는 휴양지 도시들 북편에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차가운 북풍을 막아준다. 이 거대한 400km에 걸친 휴양촌은 우리로 치면 속초에 있는 콘도미니엄보다 몇십 배는 많은 숙박시설을 거느리고 있다.
이 콘도미니엄, 현지 명으로 아파르토멘토스(아파트형 호텔)는 프랑코가 체제 안정을 굳히고 60년대 초부터 스페인을 관광국가로 육성하면서 건설되기 시작했다. 크기나 이름, 폼새로 보아 전 스페인은 물론 전 유럽의 돈깨나 있는 개인이나 기업들은 이 곳에 콘도미니엄 하나씩 지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코스타 델 솔, 말라가 같은 이름은 동양인에게 아직 낯설다. 왜냐, 동양 사람의 유럽 여행은 아직 여름방학 때 유럽에 건너와 빠리에서 박물관, 런던에서 시계탑, 로마에서 콜롯세움 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날 배낭 하나 매거나 안내인의 깃발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에비앙 생수 축낼 때, 땡볕에 흘러내리는 땀도 식힐 겸 에어콘 있는 상젤리제 쇼핑가에 들어갔다가 향수 하나 살 때, 유럽인들은 남프랑스와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의 해안에서 쉬고 있다.
텅빈 대도시는 동양인과 장사꾼들에게 맡기고 남불 해안의 코뜨 다쥐르나 스페인 코스타 델 솔, 그리스 에게해에서 낮에는 일광욕하고 밤에는 생선 요리 먹으면서.
7,8월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남쪽 해변으로 가는 비행기 편은 3,4월이면 동난다. 고속도로도 각국 자동차 여행족으로 몸살을 앓는다.
영국, 독일, 프랑스 사람의 뒷마당에서
그 대표적 장소가 파리 근교일 것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자동차 여행족이 합쳐지고, 여기에 7월 휴가족과 8월 휴가족의 바톤 터치 때문에 추석날 경부 고속도로 만큼이나 붐빈다고 한다(유럽인들의 여름 휴가는 학생이나 교직에 있는 사람이 석달 쯤으로 가장 길고, 보통의 직장인들도 4주 정도 된다. 그래서 휴양지 숙소 예약은 최소 2주 단위로 짜여지는 게 보편적이다. 7월말과 8월초는 바로 이 거대한 홀리데이메이커들의 교대기에 해당한다. 모두가 한날 한시 떠날 수는 없으니까).
영국과 독일 사람이 여름철 스페인을 먹여 살리는 증거는 스페인 주요 도시와 휴양지의 은행을 보면 알 수 있다. 꼭 여행자 환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과 독일 도이체 방크가 엄청 진출해 있다. 두 은행과 혼다, 닛산 등 일본의 자동차 회사 간판은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간판이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은 한해 300-400억 달러를 관광 수입으로 올린다. 99년의 경우 스페인을 찾은 관광객은 5000만명쯤이고 330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외화 가득률을 감안하면 거의 그 만큼의 달러가 통째로 들어온 것이다. 세계 2위의 관광 수입이다. 1위인 미국은 인구나 땅덩어리가 유럽만 하니까 비교 대상이랄 수 없고 보통의 나라 중에서는 스페인이 1등을 한 셈이다.
공교롭게 스페인의 무역 수지는 수출 1131억 달러에 수입 1491억 달러로 360억 달러가 적자다. 관광업으로 돈번 만큼 무역 수지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스페인 사람들은 관광객이 있기에 이것저것 외국 물건 마음놓고 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99년 스페인에 수출 15억 달러, 수입 2억4000만 달러 했지만 미안해 할 게 없을 것 같다. 12억 달러는 아니지만 한국인 관광객으로 인한 스페인 측의 수입도 상당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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