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5대 강국으로 도약하는 스페인 - 3

김현종의 <영국이야기 11>

등록 2001.01.26 10:18수정 2001.01.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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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도 이해하는 피카소 그림

말라가에서 조그만 콘도를 얻어 라면도 끓여 먹고 쌀밥도 지어먹으며 3일을 쉬었다. 마침 말라가 입구의 프랑스계 대형 양판점인 까르푸에서 시장을 본 게 있어 비용을 더 절약할 수 있었다. 말라가에서는 시내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을 갔다. 피카소는 말라가 출신으로 바르셀로나와 파리에서 청년기를 지내며 창작 활동을 했다. 스페인에서 피카소와 관련해 느낀 것은 세 가지.

첫째 피카소 그림이 지천으로 흔하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피카소 그림 원화를 보려면 참 힘든데. 이번 여행에서 내가 본 피카소 그림만도 300점은 되는 것 같다. 그림에 워낙 지식이 없고, 다이아몬드도 몇백 개를 한꺼번에 보면 질리듯이, 피카소 그림에 질려 대부분 그냥 지나가긴 했지만.
피카소 그림만 흔한 게 아니다. 조그만 도시의 조그만 미술관에도 무리요, 마티스, 칸딘스키, 벨라스케스, 고호, 홀베인 등 이름을 알만한 수십 명 화가들의 작품이 각각 한 두 점씩은 꼭 있다.

두 째로 대가의 작품치고는 참으로 평범하다는 느낌이다. 워낙 작품을 많이 창작한 때문도 있겠지만 문외한의 눈에는 범상한 그림이 많았다(생전에 3만여점을 그렸다는 기록을 읽은 것 같다). 특히 말라가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은 그의 초기 스케치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점 몇 개, 선 몇 개가 전부인 그림도 많았다.

평소 그림과 꾸미기,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둘째 딸아이가 그걸 보더니 "저게 피카소 그림이야, 나도 그린다"하더니 그날밤 숙소에서 한국 사람 눈에는 피카소 그림보다 의미가 선명한 스케치를 그려 보이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보다는, 묘사에 치중하는 한국식 미술 교육과의 차이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피카소의 초기 스케치 작품들이 가진 천진함, 단순함, 간명함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고차원의 감정도 쉽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글도, 음악도, 사진도, 영화도. 물론 쉽게만 표현할 줄 아는 것이 능력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런 점에서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에서 본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는 역시 대가의 역작이었다. 검정과 흰 색 같은 모노톤 만으로 인간의 희노애락 중 분노와 슬픔을 그렇게 잘 표현한 작품은 처음 보았다. "이게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라고 생각하며 본 탓도 있겠지만.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국제 사회에 고발하는 효과도 가져왔는데,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모순과 고통, 그것도 같은 동족끼리 벌이는 전쟁의 아픔, 어디서 날아온 폭탄인지도 모르고 공습에 죽어간 이들의 슬픔이 묘사돼 있다. 슬픔과 분노, 학대와 처참함으로 인해 유령이 돼 버린 인간, 뒤틀린 인간, 무너진 인간, 덜 맞고 덜 고통받으려 요동치는 인간들이 전시장처럼, 박물관처럼, 영혼들의 기념사진처럼 묘사돼 있다.
작은애는 이 그림을 보고 "무섭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피카소가 목적 달성한 셈이다. 그림 한 장으로 초등학교 4학년짜리를 무섭게 만들었으니. 게르니카는 복사본이나 사진으로는 가끔 보았지만 原畵(원화)가 갖는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고향산천의 산수가 좋아야 대 화가가 된다는데

셋째 왜 피카소가 스페인, 그 중에서도 말라가 출신일까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경치가 좋은 곳에서 그림의 대가가 나오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산수화의 대가는 절강성, 계림 출신이 많다던가. 우리도 南道(남도)의 許氏(허씨) 일문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고향의 경치가 워낙 좋다 보니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면만 그려도 멋진 그림이 된다던가. 이 말은 작가의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지만 산수가 좋은 곳에서 대 화가가 많이 나온다는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사실 세빌르부터 시작해 말라가 동쪽까지 이어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 제일의 절경이다. 공업화도 덜 됐고 무슬림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곳인 만큼 두 문명의 혼혈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안달루시아는 지금도 스페인 17개 자치구역 중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지역이다. 요즘에야 관광지로 개발됐지만. 한국으로 치면 경상남도 진해, 남해, 하동부터 여수, 순천을 거쳐 전라남도 강진, 완도, 진도에 이르는 한려수도, 다도해 지방과 경제적, 지리적 요건이 비슷했다. 물 맑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는 점이나, 사람들의 인심, 독특한 주거 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게 느껴졌다.

안달루시아는 알려진 대로 플라멩코 춤이 유명하고, 집들은 모두 하얗다. 강한 햇볕을 막기 위해 벽과 지붕을 모두 하얀 석회로 칠했다. 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줄지어 있다. 아랍 풍의 계단식 주택이어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거나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하얀 집들이 층층이 줄 서 있다. 그 집들에는 집집마다 문밖에 걸어놓은 원색의 꽃 광주리가 있고 여인들의 짙은 보라색 치마폭은 풍성하다. 한 귀퉁이에는 아랍 피가 섞인 까무잡잡한 얼굴에 또렷한 검은 눈동자의 소녀가 골목 뒤에 숨어 이방인을 바라본다.


말라가에서 200km를 달려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스페인 말로 붉은 성이라는 뜻의 알함브라 궁전. 70년대초이던가 '알함브라의 회상'을 노래로 불렀는데 (혹 알함브라의 회상과 기타 연주곡 아랑훼즈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십시오. 아랑훼즈는 마드리드 남쪽의 조그만 도시입니다).

화려, 장엄, 신비 그 자체 알함브라 궁전

알함브라 궁전은 세빌르에서 본 알카자르와 비슷했다. 대단히 큰 궁전이다. 궁전 안에 조그만 궁전이 또다시 있다. 팔라시오 나자리에스라는 궁전이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알함브라는 그라나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200m쯤 되는 언덕에 지어졌다. 패망한 왕조의 도시가 간직하게 마련인 처연한 전설이 여기에도 서려 있다.

나자리에스라는 명칭은 13세기에 창설된 무슬림 마지막 왕조를 말한다. 250년간 영화를 누리던 이 왕조는 15세기말 들어 기독교 연합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이미 그라나다 부근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무슬림들은 패퇴해 북아프리카로 쫓겨갔다.

나자리에스 왕조의 칼리프(이슬람의 왕)는 이런 상황임에도 소라야라는 이름의 기독교도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이미 결혼해 보아브딜이라는 아들까지 낳은 아이샤 왕비를 멀리하고.
이에 분격한 아이샤 왕비는 한때 성밖으로 도망쳤다가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돌아와 왕을 제거하고 어린 아들을 대신 옹립한다. 아이샤 왕비는 여성치고는 대단한 걸물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무슬림 왕조의 내분에 직면한 스페인 연합군은 "기회는 이때다"며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몇 년간의 포위로 성내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금은의 무게와 식량의 무게가 같은 값어치를 갖게 되었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알함브라 궁전 내부에서는 패망을 예감한 왕족과 귀족간 내분으로 인한 집단 학살이 계속된다. 결국 1492년 1월2일 기독교 군이 이겨 백마를 타고 입성한다. 어린 왕 보아드밀은 그들에게 성의 열쇠를 넘겨주고 망명의 길에 떠난다. 항복한 자의 당연한 요구이지만 남은 자들에 대한 선처를 당부한 채.

소년 왕 보아브딜의 눈물과 어머니의 질책

그라나다 외곽의 고갯길에서 어린 왕은 그가 자랐고, 그의 신민이 살고 있는 그라나다를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그 성은 그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다. 왕의 망명은 이베리아 이슬람 세계의 붕괴이기도 했지만 한 소년에게는 그가 아는 세계의 붕괴였다.
이때 아이샤 왕비는 아들인 왕을 보고 비장하게 나무란다.
"남자답게 성을 지키지 못하더니 이제 여자처럼 우는구나."
미련을 가진 자도, 이를 나무라는 사람도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무슬림들의 왕궁을 기독교도들이 점령 후 다시 증축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방은 이슬람 양식, 어떤 방은 기독교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름도 어여쁜 은매화 정원, 무슬림 왕이 외교 사절들을 만나던 대사들의 방, 보아브딜의 명으로 숱한 이슬람 귀족이 집단 학살당한 아벤세라헤스 홀 등이 주요한 볼거리이다. 궁전밖에는 식물원처럼 생긴 커다란 정원이 있고 더 나아가면 망루가 있다. 망루에 서면 사방 백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린 왕이 울던 고개를 찾으려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에 와서 많은 궁전과 성당을 봤지만 알함브라 궁전은 "여기서 왕이 살았고 정치를 했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군대가 주둔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진짜 궁전이었다.

소년 왕도 사라지고, 무슬림도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알함브라 궁전. 12월 말의 세밑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숱한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역시 영국, 독일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 잠깐 스페인에서의 관광 풍속도 하나. 알함브라 궁전을 비롯해 웬만한 유적지에 가면 관광객들이 귀에 대형 휴대폰 같은 것을 바짝 대고 돌아다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각국 언어로 각 방 마다 유래와 설명을 들을 수 있게 해놓은 녹음 설명 장치이다. 그 방의 번호만 알아 번호를 누르면 설명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입장할 때 입구에서 빌렸다가 나갈 때 반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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