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원, 사-학연대는 없었다

등록 2001.01.31 19:13수정 2001.01.3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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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된다."

1월 16일. KAIST의 학부와 석·박사 과정 학생 1200여명은 '시설팀 민영화 반대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총파업 중인 과기노조 천막농성장 앞에 모여 노조파업 반대 집회를 열었다.

"연구환경 파괴하는 과기노조 물러가라",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과기노조 집행부 할복하라"등 과격한 구호도 서슴지 않고 나왔다.

이것을 두고 노조측은 학생들이 학교측의 사주를 받아 대규모 집회를 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으며 이것에 대해 집회를 주최한 KAIST 대학원 총학생회(이하 원총)는 강력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사실 학생들이 노조 파업을 지지한 경우는 많았어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번 KAIST가 처음이어서 '사학연대'라는 의혹이 과기노조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왔었다.

노조가 학생들이 사측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KAIST의 정문과 몇몇 연구동에 각과에서 제작한 노조파업철회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져 있는데 이것을 학생들이 직접 제작했을 리 없으며, 11월 말 경에 학생들이 노조원 농성 천막을 강제로 철거했는데 그때 당시에 교수 몇 명이 그것을 보고 서 있었다는 것이다. 또 인사위원회 개최시 참가 교수들이 자신들의 실험실 학생 몇몇을 회의실밖에 대기시켜 놓았는데 이러한 몇몇 상황을 살펴본 결과 노조는 학생들이 학교측의 말을 따르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KAIST 학생들은 오히려 노조가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사표현을 왜곡해서 선전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처음에 학생들은 노조의 파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업의 목적은 사용자에게 피해를 주어 협상을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입어야 했다. 대학의 3주체는 학생, 교수, 교직원이다. 노조가 학생을 적어도 주체로 생각했다면 총학생회에 파업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해 한 목소리를 내달라는 과정이 분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파업한다는 대자보만 몇몇 군데에 붙혀놓고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가 학생들을 이해시키려는 과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노조에 대한 불만이 점점 높아졌던 것이다."

오상순 원총부회장은 노조가 학생을 3주체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학생들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또 노조가 학생들이 학교측의 사주를 받았다고 선전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학생들의 반노조 감정이 극대화 됐다고 했다. KAIST는 여느 대학과는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살인적인 추위에 주거시설인 기숙사의 난방을 72시간 중단했다는 것은 협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학생을 볼모로 잡았다고 보고 이것에 격분한 몇몇 학생들이 천막을 철거한 것이지 절대로 학교측이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것에 대해서 원총은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며 노조에 사과를 했다고 한다. 또 각과에서 내건 현수막은 학교에서 시킨 것이 아니라 난방중단으로 인하여 진행시켜왔던 연구들과 앞으로 추진해야될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키지 못함에 따라 연구원들이 이대로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 돈을 모아 제작한 것이지 학교측에서 제작하라고 돈을 준 것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이번 집회를 두고도 말이 많다. 외부에서는 이번 집회가 사학연대 집회로 보는 측면이 대다수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KAIST의 내부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모 인터넷 신문에서는 학생과 학교가 노조를 왕따시키고 있다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학교와 노조가 학생을 왕따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노사간의 대립을 하는데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들이다. 이번 집회 결과에 대해서 원총에서도 상당히 놀라고 있다. 실제로 집회를 준비하려면 1주일은 걸려야 하는데 집회 준비하는데 3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KAIST 특성상 다른 대학처럼 과학생회 성격이 없다. 그런데 이번 노조 파업과 관련해서 과학생회와 같은 조직이 구성됐고 학생들이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권리를 침해당할 수는 없으므로 의사 표시를 분명하게 전달해야 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에 집회 개최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일이 그 동안 학생들이 얼마나 학교에 소외감을 느껴왔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강한지 단적으로 입증해줬다. 물론 과격한 구호를 외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KAIST 학생들이 노조탄압을 자행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다 가지고 있는 지성인인데 아무리 교수가 시킨다고 해서 1200여명이 넘게 모일 수 있겠는가."

원총 배종성 복지부장은 이번 집회가 학교측의 사주를 받은 반노조 집회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며 'KAIST 학생들의 권리 찾기'자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총이 계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난방중지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노조가 해주었다면 이번 집회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부 총학생회는 노조 파업을 지켜보면서 참 많이 답답했다고 했다. 학부 총학생회 유지혜 부회장은 "노조의 전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학생들을 노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는지 답답하다. 물론 난방 중지가 파업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여기 KAIST는 안전시설이 많은 곳이고 연구에 자기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전부인데 난방을 중지하면 그것에 대한 피해가 학교한테 가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학생에게 가고 그것으로 인해 학생들이 반감을 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오히려 난방을 계속 가동하고 학생들의 여론을 움직여 학교측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난방이 중지됐을 때 원장과 보직교수들은 기숙사를 돌며 학생들의 상황을 살폈고 그것이 오히려 학생들은 학교가 노력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학교측에 문제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불성실한 협상 자세와 노조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등 문제가 더 있지만 학생들이 반감을 산 데에는 노조에서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말하며 노조가 학생들을 감싸안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노조와 학생간의 갈등은 비단 이번 파업이 원인이 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파업이 감정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지난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회의원 선거와 유성구청장 선거 당시에 과기노조원이 출마한 것을 계기로 과기노조는 학생들에게 '미래의 과학기술노동자'이므로 주민등록이전 등을 권유하며 지지를 호소했었다. 그것에 학생들도 호응했고 상당수 학생들의 기숙사를 주거지로 생각해 주민등록이전운동에 동참했는데 그런 학생들을 지금 노조가 무시하고 기숙사를 주거지가 아닌 단순시설로 인정해 난방중단을 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 평소 교직원들이 학생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불만을 느낀 많은 학생들이 '직원평가제' 도입을 추진하자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은 KAIST가 엄연히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교직원과 교수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우리도 미래의 과학기술노동자이고 노동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실제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은 프로젝트 비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우리들을 노조에서도 동반자라고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우리와 노조는 영원한 대립관계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반대하지 않는다. 교직원이든 교수든 학생을 학교의 3주체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원총 김병국 과학기술국장이 학교와 노조에게 간절한 부탁을 했다.

노조측에서도 학생들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으며 학교측의 불성실한 협상으로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부득이하게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학생들에게 파업을 선전해 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파업이 끝난 후 학생들의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앞으로 노조에서 해야할 숙제라고 했다.

1월 20일 이후 시설팀이 민영화되고 난방이 재개되면서 행정동 봉쇄에 들어갔던 과기노조는 행정동을 학교에 내주고 지금 학교측과 막바지 협상중에 있다. 학생들의 여론도 어느 정도 잠잠해진 상태이다.

KAIST는 교육부에 속해있는 다른 교육기관과 달리 과기부 소속으로 되어 있고 노조도 전국 대학교직원 노동조합이 아닌 과학기술노동조합에 속해 있다. 때문에 교직원과 학생들은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노조원들 중 학교 행정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과기노조 조합원으로 되어 있고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전문 연구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연구기관과 달리 노조에 가입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애매한 위치가 서로의 감정을 더욱 자극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KAIST는 학생, 교수, 교직원 3주체로 이루어진 교육기관이며 3주체는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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