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봐. 너희들 대학 왜 왔니?"

2001년 새내기들이 말하는 대학

등록 2001.02.13 14:26수정 2001.02.13 16:44
0
원고료로 응원
대학에 대해 새내기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공부? 묻지마. 남자친구? 잘 생기면 좋지. 이런 새내기들이 꿈꾸는 대학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긴급 수배령에 잡혀 들어온 새내기 3명.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평범한 아이들도 아니었다.

코스타리카의 밀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깨는’ 정기인(서울대 국어국문 01), 새침한 첫인상과는 달리 조곤조곤 할 얘기 다하는 김미정(연세대 인문계열 01), 아직 신입생 환영회도 못갔다며 불만스러워하는 정혜인(이화여대 법학계열 01).

대학을 나와야지만 살아남는다?

- 너희들은 대학 왜 갔어?

혜인: "우리 또래 사람들 만나서 생각을 나누고,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대학밖에 없으니까."

미정: "원하는 걸 공부하고 싶어서. 하지만 솔직히 부모님의 압력이 세게 작용했지. 주위 사람들 다 '너는 일류대학 가야돼'라고 하더군. '대학을 나와야지만 살아남는다'는 무언의 압력 있잖아."

혜인: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소위 괜찮은 대학 들어간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대학 간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아. 언니가 외대 용인 캠퍼스에 다니거든. 요즘 내가 여대라 불만이라니까, 언니가 '너는 나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 거 있지? 연극, 세미나, 집회 보고 싶어도 용인에는 포스터도 안 붙는대. 정보나,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지방에는 너무 적다는 거야."



- 이번에 서울대 못 가서 자살한 재수생 알아? H대 다니다가, 이번에 K대 좋은 과에 붙었다는데 여관에서 음독 자살했대. 그 사람은 정말 학문에 대한 풍토, 자율성 때문에 서울대에 가려고 한 걸까? 까놓고 말해서, 니들 대학간 게 지금 말한 이유만이야?

기인: "학문을 할 거면 굳이 왜 재수까지 해서 서울대, 연고대에 가냐 이 말이지? 맞아. 목표없이 공부하다 보니 공부가 좀 잘 돼서 유명대 간 사람이 대부분이야. 내 친구들 대부분이 원서 접수하는 그 날 바로 경쟁률 보고 과도 결정했고. 무의식적인 거지."

미정, 혜인: "맞아."
미정: "SKY라고 하지? ‘꼭 거기 나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근데 웃기는 건, 막상 내 문제가 되니까 그게 다 상관 없어지더라구."
기인: "학교에서 진학지도 할 때, '무조건 서울대 가라. 농대라도 서울대를 가야지' 하잖아. 고등학교 입장에서 보면 서울대 몇 명이 중요하니까."
미정: "정말로 그런 과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어. 문제는 자기 의견과 상관없이 그렇게 결정된다는 거지."


CD로 머리 맞다

혜인: "요즘 자퇴하는 학생들 많잖아. 그래서 대안학교 가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미정: "자기 주관이 있고, 스스로 혼자 서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되는 거 아니야?"

기인: "나, 고 2때 자퇴를 심각하게 고려해봤어. 잘 적응이 안되기도 했고. 그때 CD로 머리를 맞았었거든."

혜인: "하키채 얘기는 들어봤어도, CD는 처음이네."
기인: "CD로 머리 맞는 사람이 드물지.(웃음) 그게 진짜 기분 나쁘거든."
혜인: "교육체제 자체를 바꾸는 것이 힘들다면, 우리가 바뀌면 되지 않을까? 교육 주체는 우리니까. 많은 학생들이 자퇴하고 반발하고 그러면."

아이들이 고등학교의 억압적인 교육체제에 불만이 많았는지, 이 이야기는 한참동안 계속됐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 활동을 했었다는 기인이는 ‘돈’이 있어야 고등학생들의 목소리도 힘을 가질 수 있다고 꼬집었고, 미정이는 고등학교 때 받은 벌칙 하나 하나가 얼마나 부당했는지 장장 10분간 열변을 토했다.

- 그럼, 대학에 가면 달라질까?

미정: "대학교 1학년이 공부 안 한다고 하는 건, 순전히 고등학교 교육 때문이야. ‘참아야지’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거지."
혜인: "대학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1학년 때 놀고, 3학년 때 공부 시작해서 24살 정도 되면 취업하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길을 따라가는 거지. 고등학교 때 눈에 보이는 제도로 억압당했다면, 대학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행- 학점 잘 따고, 취직 잘 하고 -에 의해서 또 억압되는 것 같아."

미정: "참,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시집 잘 가려고 대학 간 거 아니죠?'"
혜인: "나도."
기인: "난 못 들어봤는데(웃음)."
혜인: "‘이대 나오면 시집 잘 간다더라’, 이 말이 CD로 머리 맞는 것보다 더 기분 나빠."


대학에서 뭐하고 싶어?

- "대학 들어가서 꼭 해보고 싶은 일 없어?

기인: "난 그거 꼭 해보고 싶어. 징병제 폐지운동. 국가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우리 나라 군대 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가기 싫은 사람은, 군대 안 갈 수 있도록 투쟁할 거야.(웃음)"
혜인: "난 대학을 28살까지 다니고 싶어. 오래 오래. 대학이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그동안은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이건 좀 유치한 건데, TV에 나와보고 싶어. 100분 토론이나 캠퍼스 탐방 같은데.(웃음) 참 니들, 아르바이트 해 본적 있어? 난 수능 끝나고 식당에서 써빙, 배달, 설거지하는 아르바이트 했었거든. 일 자체도 힘들고- 15kg 되는 거 들고 뛰어올라가야 되고…내가 좀 힘이 세잖아. 육체적인 아르바이트가 좋은 경험이더라구. 이제까지 살면서 그런 생각해본 적 없는데, ‘공부가 쉽다’는 말이 이해되더라."

미정: "아직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는 못해봤어. 월드컵 자원봉사 신청하러 갔다가, 우연히 국립암센터에서 번역 자원봉사를 하게 됐거든(미정이는 미국에서 3년 동안 살다왔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참 뿌듯하더라."
기인: "나도 월드컵 자원 봉사하고 싶은데…."

n세대라고 다 똑같지는 않아

- 사람들이 너희들만의 문화가 있다고 하잖아. (탁자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핸드폰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미정을 가리키며) 이런 거. 너희들 세대는 뭐니?

혜인: "왜 토마토 던지는 광고 보면, 20살 우리를 너무 단순화시킨 거 같긴 하지만 그게 맞긴 맞아. 선전처럼,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개방적인 일명 n세대."
기인: "나는 n세대는 음모라고 생각해.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서 세대를 규정하는 거지. ‘니들 n세대니까 컴퓨터 해’ 이런 식으로. 애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말이야. 그래도 TTL 임은경은 예뻐.(웃음)미정: 우리세대 다 핸드폰 들고 다니잖아. 어디서 연락처 적을 때도 016, 017로 시작되고."
기인: "난 아니야. 난 566으로 시작하는데…(기인이는 아직 핸드폰이 없는 희귀 동물이다)"

미정: "핸드폰, 발렌타인 데이…. 우리는 상업성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는 것 같아."
기인: "왕따도 그런 일종 아니야? 상업 문화에 속하지 못하면 안되는 거. 다들 이스트팩 가방 매고 다니는 거 보면 황당하잖아."

- 음, 그러면 n세대 말고 다른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 모래시계 고현정 같은 사람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시대의 대학, 이런 게 있을까?

혜인: "80년대에 내가 대학생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 있어. 나라면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사회를 고치기 위해 살 수 있겠다 싶기도 해. 그런 걸 운동이라고 하나? 영혜: 운동? 역기 열심히 드는 거? (웃음) 우리 세대는 학생 운동(학생 운동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대해 부정적이고 무관심한 것 같아. 대개 한총련 안 좋게 보잖아. 근데 사실 나 한총련이 뭔지도 모르거든. 언론의 영향이 크지."

기인: "80년대에는 대학생 관심사 대부분이 사회에 있었겠지? 근데 3S(sex, sports, screen)라고 하나, 이제 문화가 다양해지고 개인적인 면이 많아지면서 운동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 거야. 이른바, 수퍼 음모론이라고 할 수 있지. 할리우드 영화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누가 운동에 관심 있겠어?"
혜인: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컴퓨터나 영상 매체가 많아지면서 사회적인 것에 무관심하거나 2차적이 된 것 같아.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미정: "그래도 운동이란 게 필요하긴 한 것 같아. 대학교 처음 가봤을 때, 현수막에 써있는 ‘등록금 9%인상,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본 게 충격이었거든. 내가 생각했던 멋있는 대학과는 달라서 혼란스럽기도 했지. 하지만 등록금 자꾸 올리는 건 정말 말도 안되잖아? 그럴 때 운동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

- 자, 그럼 이제 정리해보자. 대학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미정: "모든 게 다 커진다고 해야 하나? 규모도 그렇고, 생각이나 기회도. 대학은 큰 거."
기인: "대학. ㄷ과 ㄱ이 들어가서 그런가? 말 자체로는 딱딱한 느낌. 그리고 자유라는 말도 떠올라."
혜인: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한문도 많고 어려운 거 배우는 곳."

오늘 생전 처음 만난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니. 예상 외였다. 하지만 정작 더 놀랐던 건 그 다음. 집으로 가겠다며 나란히 지하철역으로 향했던 아이들, 결국 셋이서 노래방에 갔단다. 역시 01학번은 달랐다.


<진행: 김조영혜 기자/ 정리: 황예랑 기자>

덧붙이는 글 | 대학생신문(www.e-unipress.com) 126호 새내기 특별호에 실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대학생신문(www.e-unipress.com) 126호 새내기 특별호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