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결승전. 한.일 월드컵이란 이름 탓인지 공교롭게도 축구 앙숙인 양국이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다. 전.후반 치열한 공방에 연장전까지 치르고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은 승부차기 한 판. 한 골 한 골 숨막히는 순간이 TV로 생중계 되는데 서울 사는 김씨 2시간을 넘게 참았던 소변을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결국 화장실로 향한다. 리모콘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뜬 김씨는 볼 일을 마친 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러 TV 생중계를 계속 본다. 결과는 한 골차로 한국의 우승.
1년 뒤 실제로 벌어질 이 장면은 김씨네 집에 TIVO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있기에 가능했다. TV라면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사족을 못 쓰는 미국 사람들이 요새 사고 싶어하는 전자제품 1순위가 바로 TIVO다.
TIVO는 대용량 하드디스크에 방송전파를 60시간 분량까지 디지털 고화질로 저장하여 마치 비디오 테잎을 보는 것처럼 생방송을 자유롭게 정지하거나 재생할 수 있고 시청자가 미리 설정해 놓은 마춤 시간표에 따라 원하는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신통한 기계다.
TIVO만 있으면 이제 더 이상 인기 드라마 '아줌마'를 보기 위해 친구와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종종걸음을 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로서는 20년 전 VCR 등장 이후 가장 혁명적인 신기술을 접하게 된 셈인데 이것이 거꾸로 미국의 민영 방송사들에게는 악몽의 시작이 됐다. 바로 TIVO에 광고를 자동으로 건너 뛰어 녹화를 해 주는 기능이 있었던 것.
1시간짜리 인기 드라마에 따라 붙는 수십 개의 광고를 자동으로 잘라 내 성가시기만 한 중간광고 없이 45분짜리 온전한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실수로 광고가 그대로 녹화됐다 해도 버튼 하나로 간단히 광고를 건너 뛸 수도 있다.
CBS 인기 시사프로그램 '60분'에 따르면 TIVO가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속도로 보급이 되면서 당장 광고 수익으로 연명하는 각 방송사 경영진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이들은 5년 내에 미국 가정의 50% 이상이 TIVO를 보유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럴 경우 광고수익에 제작비를 의존하는 대신, 현재의 유료 채널처럼 Pay Per View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분석까지 내 놓고 있다.
광고주들 역시 고민은 마찬가지다. 가장 강력한 광고수단인 TV의 파급력이 TIVO로 인해 쓸모 없게 된다면, 광고주들은 소비자가 광고를 자발적으로 보도록 유인하는 새로운 장치를 고안해야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광고를 한 번 볼 때마다 시청자에게 일정액의 적립금을 예치해 준다거나 아니면 제품 구매시 할인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내 놓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뾰족한 수가 없어 시름이 깊어 가고 있다.
이들은 시청자들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방송을 즐기는 것이 다 광고주 덕인데 광고를 이렇게 박대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볼멘 소리지만 매일 같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광고 홍수에 치를 떠는 미국의 시청자들은 TIVO의 등장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조만간 TIVO가 보급될 것이 분명한 한국의 방송사나 광고주들 역시 지금부터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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