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스피커 선택

원음에 대한 환상부터 깨자

등록 2001.03.23 03:41수정 2001.03.2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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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 빅터 소속 음반 중에 축음기 나팔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강아지 그림과 함께 HMV라는 영자가 새겨진 레이블이 있습니다. HMV는 His Master’s Voice의 약자이지요. 축음기를 만든 기술자가 자기 목소리를 시험 삼아 녹음한 뒤 재생하자 주인의 목소리가 축음기 속에서 들리는 것에 어리둥절해진 강아지가 귀를 쫑긋하며 나팔 속을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순수원음 재생기기로서 오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지요.

DVD, MP3 등 최첨단 디지털 오디오 장비들이 보급되고 있는 요새도 오디오는 역시 원음을 충실하게 재생하는 기기라는 우리의 인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매트릭스'의 귓전을 스치는 탄알 소리는 원음인가요? 베트남 해변을 종횡무진하는 '지옥의 묵시록'의 헬기 소리는?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의 베토벤 5번 교향곡 CD는 그렇다면 원음을 숨김없이 재현한 것일까요? 아쉽게도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모두 "아니올시다" 입니다.

원음재생의 첫단추는 녹음실

오디오 애호가들은 큰 돈을 들여 최고급의 기기를 갖추고는 드디어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며 만족해 합니다. 많은 예산을 투입한 오디오가 소유자에게 감동적인 소리를 들려줄지는 모르겠으나 그 소리가 원음이냐는 질문에 해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디오 기기가 무엇인가요? 현장의 음을 직접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녹음과 재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원래의 소리를 들려주는 장치라고 정의를 내려봅시다. 그렇다면 오디오 애호가들이 그토록 관심을 기울인 원음재생의 노력이 이미 녹음된 소리를 재생하고자 하는 절반의 과정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원음의 재생에 있어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스튜디오의 녹음과정입니다. 연주자가 연주를 하면 스튜디오 안의 수십 개에 이르는 마이크로 소리를 잡아내 녹음하고 다시 마스터링 및 편집을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죠. 이런 작업은 고도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므로 개인이 취미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오디오 애호가는 음반회사가 만들어준 녹음된 결과물을 원래의 녹음상태 그대로 최대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반회사의 녹음기술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원음이란 것을 그대로 들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 연주에는 보통 50~60여개의 마이크가 투입되며 스튜디오의 60채널짜리 디지털 녹음기로 악기 하나 하나의 소리를 녹음합니다.

그러나 소비자의 앰프와 스피커는 스테레오 즉, 2채널이기 때문에 녹음기술자는 60개 마이크에서 잡아낸 소리를 자기의 주관에 따라 좌.우 양 쪽 채널에 선택적으로 내보내고 각 채널의 음량이며 음색을 조정하는 믹싱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런 채널 배분이 끝나고 전체적으로 다시 음조를 균질하게 하고 음색에 윤기를 넣는 디지털 작업을 추가로 한 뒤에야 결국 소비자들이 음반을 통해 듣는 소리가 탄생합니다.


결국 가장 원음에 충실하리라 믿었던 클래식 음반조차도 녹음실 안에서 끊임없는 가공 작업을 통해 원래의 연주음과는 꽤 거리가 있는 왜곡된 소리로 변질하는 것이죠. 하물며 아예 출생지 자체가 컴퓨터인 테크노 음악이나 오로지 샘플링 작업만으로 탄생하는 락이나 팝뮤직에 이르면 도대체 원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마저 일어나게 됩니다.

테크노 시대의 스피커


다시 처음에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가 보지요. 매트릭스에 나오는 탄환이 귓전을 스치는 소리는 원음인가요? 아니 영화 관객 중에 정말 탄환이 귀를 스치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요? 갈수록 테크노 풍으로 흐르는 팝 음악이나 사이버 펑크 계열의 영화로 인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공의 음향효과가 범람하고 있는 요즘 오디오나 DVD 매니어에게 Hi-Fi 즉 고충실도 음향기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LP시대와 비교하면 요즘의 오디오는 더욱 혹독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먼저 주파수 대역 자체가 기존의 20Hz-20KHz를 넘어서는 극한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요즘의 어지간한 CD는 다이나믹 레인지가 90dB를 우습게 넘어섭니다. 더구나 총탄 튀는 소리, 우주선 날아가는 소리, 레이저 광선 소리 등 각종 희한한 사이버 음으로 가득한 DVD를 재생하는 앰프나 스피커의 경우엔 더욱 극한의 재생조건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오디오 애호가는 특히 스피커의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고음역을 재생하는 트위터나 초저역 재생용 서브우퍼는 예전의 클래식/재즈 재생에나 어울리던 스피커와는 차원이 다른 부하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기존의 클래식/재즈 재생용 스피커를 소유하고 있는 오디오 매니어는 되도록 이 용도로만 스피커를 활용해 얌전한 음악감상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새 포도주엔 새 푸대가 필요한 법. 오디오에서 AV 쪽으로 확실히 방향전환을 할 계획이라면 이왕이면 고성능의 트위터 전용 스피커나 서브 우퍼에 별도의 예산을 투입하여 DVD 영화감상에 대비하는 것이 애지중지 아껴온 재래식 스피커도 지키고 새로 몰려오는 사이버 펑크 영화도 최대한 즐기는 비결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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