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놓친 일장기 말소 왜곡의 진실

등록 2001.04.07 13:48수정 2001.04.0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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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지난 4일 ‘동아,친일 언론보국 서약’이란 기사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편협하게 다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한겨레>의‘동아,친일 언론보국 서약’이란 기사에 대한 ‘동아투위’란 네티즌의 반론은 언론개혁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면서,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겨레>가 족벌언론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의 역사를 평면적으로 해석해 잘못된 역사인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겨레> ‘동아,친일 언론보국 서약’기사 보기

물론 ‘동아투위’란 네티즌은 <한겨레>가 구체적인 기사를 들어 소개한 <동아일보>의 친일사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겨레>가 당시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에 대해 너무도 단순하고 편협하게 접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한겨레>는 4일 ‘…조선의 아들 손기정이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기 때문이다. 이해 8월 25일 <동아일보> 체육부의 이길용 기자는 월계관을 쓴 손 선수의 금메달 수상 사진에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 이를 신문에 내보냈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면서 1976년 발간된<동아일보사사>를 인용해‘이런 민족의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의 대변지를 자임해온 <동아일보>가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누구의 지시도 아니, 명령도 아닌 거의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또 ‘그러나 이 사건을 접한 경영진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사실을 알고난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인촌 김성수전>, 동아일보사, 1976)’고 보도했다.

말하자면 이길용 기자는 친일파 사장단 몰래 일장기를 지웠고, <동아일보> 경영진은 서둘러 이길용 기자와 화백을 해고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는 것. <동아일보>는 훗날 이를 동아의 항일역사라 자랑했지만, 이것은 이길용 기자의 자작극에 가깝다는 얘기다.


그러나 5일 ‘동아투위’란 네티즌은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동아일보>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 김성수가 사장으로 있는 동안 325번이나 압류를 당했다. 친일파라면 왜 압류를 당했겠느냐? 이길용 기자가 일을 꾸몄을 때 모두가 이심전심 암묵적 지지를 했기에 신문이 나올 수 있었다”며 인용글을 섞어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후 사환이 같다 준 사진을 받아든 이상범은 아무 주저없이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제판원 기술자 백운선도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대로 조판을 넘겼다. 편집국장 최승만은 "당시 동아는 그같은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구름낀 하늘에 비가 옵니다. 비를 내릴 구름이 동아엔 늘 끼어 있었지요. 평소 그분들에게서 민족에 대한 애정이나 조국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지요. 우리는 바로 그런 분위기가 다른 기관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있었지요"라고 말했다. 또 일이 터진 후 이길용 기자가 김성수에게 ‘죄송하다’ 하자 오히려 " 내가 자네라도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싶었을 걸세. 손기정이 일본청년인가? 조선청년이지! " 며 괜찮다고 격려했다.’

<한겨레>는 또 <동아일보사사>를 인용, '<동아일보>는 이길용 기자와 관련자들을 쫓아낸 뒤 다음해 6월 2일 속간과 함께 낸 `사고'에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해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 하고 스스로 `일본 언론'임을 서약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동아투위’란 네티즌은 “당시 사건으로 이길용 기자만 잡혀간 것이 아니라 사장 송진우 등 무려 42명이 잡혀갔다. 이길용 기자를 해고한 것이 아니라 "같이" 잡혀갔다. 또 이 일로 무기한 정간당했다. 또 이길용 기자는 후에 복직됐고 해방후 인촌 김성수 선생이 한민당과 관계할 때 당원으로 함께 일하다, 6.25때 납북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촌과 이길용 기자가 서로 적이었다면 후에 어떻게 같이 일을 하느냐?”며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 사건을 팔아 먹었다면 <한겨레>는 이를 왜곡하고 재포장해 또 팔아 먹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동아일보>의 친일 사례를 소개한 뒤, ‘이런 극렬한 친일논조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40년 8월 10일 폐간된다. 일제가 조선어말살정책과 전시하 물자절약 차원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는 사사에서 “이즈음 동아·조선 양대지의 논조와 색채는 이미 <매일신보>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퇴색해 있었다”(<민족과 더불어 80년>)고 자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쨌든 <동아일보>가 스스로 밝혔듯이,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사주 김성수는 <매일신보>에 학병 출전을 독려하는 논설을 쓰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한다’고 끝을 맺었다.

‘동아투위’란 네티즌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독단적인 해석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김중순 씨가 쓴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란 책을 인용해 ‘일본은 한국의 민족주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기로 결정했다. 미쓰바시는 <동아일보>의 백관수와 송진우 그리고 <조선일보>의 사장이었던 방응모를 자신의 관저로 불러 자발적으로 신문사를 그만둘 것을 설득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총독부가 종업원의 1년치 급여를 모두 지불할 것이며 윤전기를 비롯한 모든 설비를 구입할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즉시 미쓰바시의 제안을 거부했다. 총독부가 자발적 폐쇄를 권유하다 불법회계의 죄목을 날조하면서 송진우(당시 <동아일보>사장)는 귀국하는 길에 부산에서 구속됐다. 백관수와 김승문도 구속됐다.

임정엽은 심한 고문을 당해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일본은 폐쇄신고서를 받아내기 위해 병과 고문으로 의식불명된 임정엽을 발행인 및 주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거의 모든 <동아일보> 중역들이 투옥됐으며 <동아일보>가 영구폐쇄된 뒤 풀려날 수 있었다. 1940년 내선일체운동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이 공표된지 넉달만에 87%가 창씨개명을 했다. 김성수와 그의 동료들인 송진우, 현상윤, 장덕수, 백관수 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연희전문의 경우 5명을 제외한 전 교수진이 창씨개명을 했음에 비해 보성전문은 5명만이 창씨개명을 했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일제가 우리 언론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아래 탄압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일제말기 친일로 돌아선 것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릇된 정보는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대한매일> 전신)에 의해 조작됐다. 서정주 같은 이는 일본제국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한다. 만약 조선 동아가 1940년 폐간당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 동아가 친일지라면 왜 폐간을 시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과거 친일을 문제삼으려면 일순위는 당연 <대한매일>이다. 일제는 조선 동아를 폐간시킨 뒤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를 동원,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선전하고 인촌 김성수 등의 이름을 차용해 "학도여 성전에 나아가라!!" 는 글을 실으며 학도병참가를 획책했다. 매일신보야 말로 척결의 대상이고 친일지”라고 주장했다.

<한겨레>가 조선 동아의 친일 사례를 소개하면서 ‘친일지’리고 표현하고 있으나, 조선 동아는 <대한매일>과는 성격을 달리했으며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간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함께 ‘학도여 성전에 나아가라’라는 글은 인촌이 쓴 글이 아니었고, 인촌은 오히려 학도병 반대 지하운동을 이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192쪽에 따르면 ‘학도병 출신의 보전 학생들은 신문에 어떻게 쓰여졌건 그것을 실제 김성수가 생각했던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성수는 "왜 내가 학도병 동원에 간여 하겠는가? 나는 한국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했지 그들을 동원하도록 주선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학생을 동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서 거의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 하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

또 ‘민족진영학생단체 전국학생총연맹(全國學生總聯盟)위원장을 지낸 이철승은 그 말을 가능하다면 징집문제를 기피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 했고, 일부 보전 교수들 역시 학생들에게 징집을 기피하라고 권고했다. <동아일보>에 실린 이철승의 글은 김성수가 그에게 학도병 반대 지하운동을 조직하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동원돼 전선에 보내지고 있을 때 총독은 한국인 저명인사들에게 학도병 동원을 촉구하는 논설을 매일신보에 쓰도록 했다. 명단에는 김성수 송진우(당시 <동아일보>사장) 여운형 안재홍 이광수 장덕수 유진오 등이 있었다. 유진오는 김성수가 그런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김병규는 자신이 대신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다.

유진오는 "내가 김성수의 이름으로 게재된 글의 저자를 밝히는 이유는 그 글로 인하여 해방후 인촌이 부당한 비판과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동아투위’라는 네티즌은 끝으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란 책을 인용, ‘북한의 정통 사학자들조차 김성수와 같은 기업가가 적어도 초기에는 노골적인 매판자본가나 '종속적' 자본가라기 보다 "민족적 개혁가"라는 견해를 피력했다’며 <한겨레>가 인촌을 마치 친일파인 것처럼 표현한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만일 무력투쟁이나 정면 대결만이 독립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김성수는 확실한 독립투사가 될 수 없다. 그의 부인 이아주는 결혼하기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김성수 자신은 일본인과 무력투쟁을 한번도 한 일이 없고 일본인의 감옥에 한번도 수용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일본인들에 의해 수모를 당했지만 그는 각종 사업을 위해 일본인과 상대하지 않을수 없었고 때로는 일본인 관리들과 허다한 시간을 함께 해야 했다. 3.1운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중앙학교팀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수, 현상윤, 송진우(당시 <동아일보>사장)등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현상윤, 송진우는48인 명단에는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현상윤과 송진우는 일본당국에 체포 됐다.

김성수가 운동에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면 감옥밖에서 조직을 강화하고 지원하며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김성수가 운동에 관여했던 것이 알려졌더라면 중앙학교의 폐교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안창호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일본당국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를 폐교 시킨 바 있다.’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김중순 著, 일조각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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